인간과철학

믿음과 평가, 그 실체없는 근원

아이루다 2013. 6. 5. 09:54

 

어제 저녁무렵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한쌍의 남녀를 보았다. 그 때가 이미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할 7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이 두명의 젊은 연인은 운동겸 해서 같이 밖에 나온 모양으로 보였다. 그 때 내가 있던 장소가 성내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는 자그마한 벤치였으니 아마도 그것이 거의 확실 할 것이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두 남녀에서 내가 느낀 첫번째 것은 외모적인 판단이었다. 남자는 작고 통통했으며 여자 역시 작았지만 말랐다. 그리고 둘 모두 운동을 위한 것인지 약간 늘어진 체유복 비슷한 하의와 심플한 티를 입고 있었는데 순간 내 머리속에서 일어난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점수는 아니었다. 뭐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리 예쁘지 않는 여자, 키가 작은 남자, 입고 있는 옷의 허술함.. 이런것들은 원래 외모적인 평가기준에 따르면 점수가 낮은쪽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나는 잠시 그 생각을 한 후 갑자기 오래된 의문에 빠졌다. 그것은 바로 내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들의 외모를 판단하고 있을까?

 

인식 할지 못 할지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실제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판단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길을 걸을 때 그런 현상은 매우 일상적인 행동이다. 물론 친구와 같이 걷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통화를 하거나, 급한 일이 있는 등의 다른 바쁜일이 있어서 인식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뭔가 신경쓰이는 일이 없다면 길을 잘 걷기 위해서라도 주기적으로 앞으로 바라보면서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다.

 

현실적으로도 이것은 생명체의 생존본능과 연결된 무의식적인 행위이고 우리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이 행위는 나의 길의 장애물이나 위험요소를 빠르게 감지해내는 무의식적 두뇌 활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능력으로 인해 우린 넘어지지 않거나 혹은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곤충은 눈으로, 더듬이로, 냄새로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새나 포유류는 뛰어난 시각과 후각, 청각등을 이용해 이런 정보수집을 한다. 인간은 여기에서 더 발전해 비록 감각기관의 능력은 떨어져 후각과 청각같은 정보는 잘 수집하지 못하지만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시각의 인식기술을 이용해 상대의 표정, 상태, 행동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수집해서 그것을 자신의 경험과 결합하여 빠른 분류를 해 낸 것이다. 하지만 우린 보통 길 가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이때는 다른 동물들과 다른 부분에 더 집중을 하게 된다.

 

사람의 외모는 예쁘다, 아름답다, 잘생겼다. 귀엽다, 못생겼다, 무섭게 생겼다, 정 떨어지게 생겼다, 키가 크다, 작다, 뚱뚱하다, 말랐다, 쫙 잘빠졌다, 몸매가 좋다, 하체가 길다, 짧다, 어깨가 넓다, 좁다, 얼굴이 둥글다, 길다, 역삼각형이다, 근육이 많다, 비실비실하게 생겼다 등등 다 쓰기기도 어려운 정도로 표현 문구가 많다.

 

우린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혹은 잘 아는 사람을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볼 때 왜 이런 판단을 하고 있을까? 물론 아까도 언급했듯이 이것은 생존과 관련이 되는 문제이란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특히 도심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자신의 생존에 대한 의문을 품기엔 우리 사회가 너무 안전하다. 그래서 그 부분은 그냥 그 사람들과 내가 부딪히지 않을까 하는 수준의 정보 판단으로 끝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더해 분명히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특히 평범함을 약간이라도 벗어난 외모는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좀 더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아마도 생명체의 가장 큰 임무인 짝짓기에 대한 본능과도 연결이 된다.

 

실제로 남자들은 지나가는 수 많은 여자들을 동시에 봐도 단지 쑥 한번 훑어 봄으로서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운 상대를 구분해 낸다. 거기에 다양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냄새나 동작도 우리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이성적 상대를 구분해내는데 어느정도 역할을 한다고 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가임기에 들어서지 못한 아이들은 길을 갈 때 거의 상대를 무시하고 있으며, 가임기가 끝난 노인들 역시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은 인간의 지적 활동 중 하나이기 때문에 단지 짝짓기를 위해 우리가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만은 아니다. 우린 이런 다양한 인간 관찰 활동을 통해 개개인의 자료를 누적시켜 다양한 판단을 하는데 사용한다. 즉 우린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는 것인데, 예를 들어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가 몸매마져 좋으면 상당히 자존심이 쎄고 눈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바로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도 미리 예측해서 괜히 그런 여자들에게 들이댔다가 시간과 돈만 깨지는 손해를 보는 불행한 현실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정보는 개개인별로 너무 다르고, 또한 잘못된 것들이 많아서 실제로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형태의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원래 논점으로 돌아가서 우린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의 잘남과 못남을 판단하는지 생각해보자.

 

지금부터 한 20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조선시대, 양반네 여인들은 쓰개치마라는 얼굴 가리개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한복을 입고 돌아다녔고 또한 그 돌아다님조차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닌 세상이었다. 결국 남자들은 여자들 얼굴보기가 참으로 힘들었으며 겨우 기생집에나 가야 여자와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중인이나 천민이라도 좀 더 다르겠지만. 아무튼 여자의 정조는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되었고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게 아니라 부모가 정해준 상대와 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서 아름다운 여성이란 무엇을 의미했을까?  오늘날과 같은 작은 얼굴, 마른 몸매, 큰 눈, 바르게 뻗은 다리, 긴 하체 등이 여성의 미였을까? 아니면 방금 내가 말한 이 미의 기준이 바로 우리가 끝없이 접하고 보고 들은 서구 여성들의 보편적 특성일까? 분명히 조선시대엔 서양 여자들의 미모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당시는 어쩌면 애를 잘 낳게 생긴 엉덩이가 펑퍼짐하고 가슴이 큰 여자가 미인의 결정 요소 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관상도 보았을테니까 고집이 세지않고 체력적으로도 튼튼하며 가지런하고 단단한 이를 가진 특성이 더해졌을 것이다. 쓰다보니.. 무슨 황소 품평회 같다.

 

가정한 이야기이지만 이 점은 미녀에 대한 우리들의 현대적 기준점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해준다. 내 생각에 클레오파트라가 2천년 전 최고의 미녀였을지는 모르지만, 현대에 다시 보면 정말로 형편없는 미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아직도 미녀로 손꼽히는 까닭은 단지 사진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금발의 늘씬한 서양 미녀들을 보다가 우리나라에서 나름 미녀축에 속하는 여자들을 보면 어떨땐 참 볼품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금발, 파란눈, 긴 하체, 하얀 피부, 큰 가슴.. 이런 특성은 우리나라 보통의 여자들은 갖기 힘든 특징인데 특히 머리나 눈 색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하얀 피부나 큰 가슴은 노력과 수술의 힘으로 변화를 하기도 하고 긴 하체도 요즘은 그래도 조금 보이기도 하다.

 

아무튼 평균적으로 동양인 여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서양인 여자들의 미모를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 이것이 바로 동양 여자들이 열등해서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세상에서 살아왔기에 서양 여자들의 외모에 더 끌림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양여자들이 근본적으로 외모적인 부분은 열등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바로 이 외모의 기준이 서양인을 기준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우린 조선시대를 끝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선조들의 유산을 버렸다. 크게는 정치제도, 사회문화.. 작게는 각종 생활문화와 가치관, 배우는 학문, 각종 편의도구까지 모두 우리 것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 우리가 요즘 하고 있는 생활을 생각해보라. 집안의 각종 전자제품, 집안 구조, 가족 형태, 난방형태, 의복, 사람들과 만나서 하는 짓들 등등 우리 고유의 것이 어디있는가?

 

좀 더 냉정하게 밀해서 우리 사회는 정치제도, 법률까지 모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것을 다 버렸으니, 우린 그저 그들이 준 제도의 복사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우리가 가진 가치관이라고 해서 우리 고유의 것일 것인가?  물론 민족마다 다양한 고유 영역으로 알려진 민족성이 있긴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민족성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기준을 의심없이 절대화 시킨다는 점이다. 언젠가 본 강의에서 10대와 60대의 차이는 거의 종족이 다른 수준까지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 10대 청소년의 가치관이나 판단기준과 60대 노인의 가치관과 판단기준의 차이는 어쩌면 우리나라 10대 청소년과 미국의 10대 청소년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우리의 그런 절대적 가치관이나 기준점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실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어떤 시대에 살았느냐 혹은 주변에 어떤 친구를 사귀었느냐에 따라서도 매우 유동성이 심한 것들이란 말인데.. 문제는 먼저 말했듯 우린 그것을 절대화 시키고 심지어 신념화 시키기며 그것에 거스리는 사람에게 무한한 비난을 퍼붇기도 한다.

 

정치신념, 가족에 대한 신념, 직장 생활에 대한 신념, 친구에 대한 신념 등등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수준의 생각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우리의 끝없는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내가 단어를 신념이라고 표현해서 그나마 완화되게 말한 것이지, 이것이 아집,고집, 똥고집 등으로 표현되면 정말 이런 것들은 우숩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이지만 나를 비롯해 거의 모든 성인들은 이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거나 혹은 확고한 입장을 보인다.

 

도대체 뭘 근거로 그리 확신을 하는지에 모를,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무한한 애정, 국가에 대한 애국심, 포장된 가족 이기주의, 개인의 욕망을 표출하면서 그것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뻔뻔한 사고방식 등등이 모두 이런 종류의 확고한 가치관과 기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요즘 이런 저런 종류의 책과 정보를 접하면서 내가 공통으로 듣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다양한 생각이나 사상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될 때 우린 고정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종교를 선택하고 , 지지정당을 선택하고, 자신이 믿는 가치관을 선택할 때 우린 그 선택의 반대에 있는 수 많은 종교와 가치와 생각과 사상들을 모두를 버리는 셈이 된다는 말이다.

 

어려운 말이지만.. 생각하면 할 수록 마음에 와 닫는 말이다. 우린 왜 늘 우릴 고정하려고 할까? 그 고정하는 근원 자체가 유동적이고 변화성이 큰데도 불구하고 우린 거기에 꼭꼭 우리를 묶고 있다. 마치 끝없이 표류하는 뗏목위에 나를 고정시켜 움직이지 않게 하는 일처럼 우린 우리 자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현실적으로 고정은 모호함, 불안감, 흔들림을 없애질 수 있기 때문에 유효한 수단이다. 특히 젊은시절의 방황이 바로 이런 현실사회에 대한 부정과 자신이 배운 이상과 실제 현실사이의 갈등이라고 보면 결국 고정되지 않은 것은 방황이나 도태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요소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뭔가에 고정되고자 한다. 그래야 안락하고 편하고 스트레스 자체도 줄어든다. 그래서 우린 늘 고정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고정을 되기 위해서는 답을 찾아야 한다. 뭔가 확실한 답이 있어야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인데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종교,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 과거의 향수 등으로 고정되어 진다. 그래서 마치 변화가 생기거나 혹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어떤 사상이나 믿음이 다른 이들로부터 전달되오면 그것을 대단한 문제로 인식하고 자신의 단단한 끈을 지탱하고자 상대를 사정없이 공격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신이 묶은 그 단단한 끈이 매일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뗏목에 묶여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끈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남들도 자신과 같은 끈을 묶고 있음을 보면서 '내가 틀리지 않았음' 이라고 믿고 의지한다.

 

오늘 하루라도 내가 도대체 어디에 묶여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보기 바란다. 내가 정말로 옳고 당연하고 너무도 자연스럽다고 느낀 생각에 대해서도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그러면 나와 갈등을 빚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 역시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론이 아닌 과정이다. 하지만 늘 우린 결론을 내고 답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사는 것의 결론은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죽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