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틸 수 있는만큼 버틴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행복기금이란 명목으로 악성 채무자에 대한 구제정책이 나왔다. 물론 대선공약에 비하면 대상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결국 빚지고 안갚는 혹은 못갚는 사람에게 정부가 대신 빚을 갚아주는 행위로 보인다. 물론 못갚는 사람에겐 좋은 정책일 순 있지만 안갚고 있는 사람은 말 그대로 횡재를 한 셈이 된다. 그리고 못갚는 것과 안갚는 것 차이는 너무 개인적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다양성은 외모에서도 오지만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다양성은 어쩌면 성격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한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대인관계 훈련을 하게도 만들어 준다. 아무튼 지금은 이 다양함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차이점 중 하나인 스트레스를 참는 힘, 다른 말로 하면 인내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도 그런 경향이 좀 있지만 어떤 이들은 어쩔수 없이 빚을 지게되면 그것을 매우 큰 스트레스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후로 벌어들이는 모든 돈을 최대한 빚을 청산하는데 사용한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보통 빚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매우 적고 또한 갚아 나가는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빚을 지고도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법적으로나 혹은 인간적으로 이자를 지불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원금을 떼먹고 도망가서 숨어 사는 사람까지 있는 형편이니 처음에 말한 빚을 싫어하는 사람과 이런 사람의 간극은 도대체 얼마나 클까?
이런 경우도 많다. 특히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의 경우가 큰데, 정말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그 일을 계속 해나가는 분들이 있다. 나 같으면 도저히 못할 일을 그분들은 꾹 참고 해낸다. 물론 거기엔 자신이 책임진 가족과 그 자신의 삶과 노후가 담겨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분명히 개인간에 차이가 있다.
또한 반대로 조금이라도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하면서 집에서 부모님에게 달라붙어 백수로 지내는 젊은 사람들도 있다. 갖은 구박을 당하거나 혹은 매일 부모님의 한숨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히 그 삶을 유지해 나가는 그 모습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영역이다. 이 극단적 두가지 상황에서 나는 동시에 같은 것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상황인 것이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매우 부지런하며 힘든 상황을 잘 극복해내는 참을성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에 쯧쯧하면 혀를 차면서 보는 형편없이 게으른 이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사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실제로 스스로를 극복해내면서 언젠가는 지금의 모습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가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틀리지 않다. 어쩌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어려운 환경일수록 더욱 그 자신을 다그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최대한 편하게 살려고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일에 아무런 필요성과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너무도 착해질 수도 있다. 마치 내일 삶의 마감을 앞둔 이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도 착해지는 선택을 하는 것처럼 우린 만약 내가 오늘 이득을 볼 정확한 필요가 없다면 딱히 남들과 그것에 놓고 경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인간들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착한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강한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원하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소망이나 꿈, 좋지 않은 의미로는 욕망과 같은 단어로 표현한다.
천성이 게으르고 편하게 살려고 하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스트레스' 이다. 우리의 뇌는 우리 몸의 생존을 위해 계속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이것은 외부에서 오는게 아니고 그 자신으로부터 고유하게 발생되는데, 왜냐하면 편하다고 해서 매일 누워있다간 굶어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는 우리의 공복을 자극하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계혹 상기시켜 힘들어도 먹을 것을 구하러 만든다.
이런 본능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행동의지는 매우 다양하다. 남자가 자신의 2세를 남기기 위한 여자를 얻기 위한 눈물나는 노력도 그렇고 반대로 여자도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자신과 아이를 잘 보살펴 줄 남자를 찾아 나선다. 우린 매일 이런 생존을 기반으로 한 성욕과 식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이것을 어떻게 참아내느냐에 따른 인간 성격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표출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극에 대한 인간 행동의 다양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모습이 된다. 즉 배가 고파 식량을 얻어야 하는 목표를 가진 인간은 남에게 부탁해서 얻기, 남에게서 뺃기, 일해서 얻기, 직접 심기 등등의 선택을 통해 얻어내고 이 방법의 효율성을 가진 이들은 남들과 다른 커다란 식량을 얻어내곤 한다. 여기에서 타고난 육체적, 정신적 능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것보다 우선해서 고려해야 할 내용은 바로 어떤 종류의 스트레스이든 내가 얼마나 참아낼 수 있거나 혹은 무시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이 스트레스는 나로부터 생성되기도 하지만 남으로부터도 많이 생성되기 때문에 우린 매일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린 매일 도심에서 소음공해, 시각공해, 빛공해, 언어폭력, 육체폭력, 관계의 실패, 이해할 수 없는 인간과의 연속된 관계 등등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마도 스스로 만들어 낸 생존본능에 따른 스트레스를 제외하고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인은 바로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발생된 것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일을 하는 스트레스도 꽤 크다고 믿겠지만 그 일 역시 인간관계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런 스트레스는 모두 개개인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태생적으로 스트레스를 잘 참는 성격이 있다. 보통 우리가 태평한 성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반대로 조급증을 가진 사람들은 이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개나 고양이도 이런 성격적 특성이 있어서 어떤 개는 엄청나게 짖고 어떤 개는 꼬리를 열심히 흔든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 말했던 빚을 진 사람들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이 된다. 그것은 바로 빚을 지고도 참아내며 버티면서 살아갈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다. 만약 빚을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었다면 실제로 다 갚거나 정말로 죽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정부정책이 나오니 못참고 갚은 사람들이 화가 나는 모양이다. 물론 이해는 간다. 도적적 해이라는 명분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 결국 누구나 도적적인 명목으로 빚을 갚진 않는다. 단지 자신이 그것을 참을 수 없기에 갚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잘 다스르고 참아낼 능력을 가진 사람은 확실히 경쟁에서 우월하다. 스트레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는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효율이 높은건 아니다. 물론 적당한 스트레스, 즉 긴장감은 어떤 일을 할때 매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것이 조금만 과해도 사람은 앞뒤 분간을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실수를 심하게 할 수 있다. 운동경기를 망친 선수가 그렇고 시험을 망친 학생이 그렇다. 그리고 결국 그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삶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스럽게 여겨지도 하지만 실제로는 어쩌면 이 '스트레스'에 모든 것이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몸은 자연적으로 생존 스트레스를 우리에게 느끼게 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외부와 소통할 때 외부 스트레스가 또 따라온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식으로 버텨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면서 삶 자체가 변화된다.
우리는 그래서 소위 잘 버틴 사람들을 존경한다. 남들보다 훨씬 강한 스트레스 환경에서 버텨내고 자신의 꿈을 이룬 이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파하여 그렇게 사는 것이 훌륭하고 보람찬 삶인 것처럼 광고를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좋은 사례로 소개를 하고 위인전으로 엮어 읽게 한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과연 개개인의 의지였을까?
나는 스트레스를 참는 힘은 타고난 성격 + 자라난 환경이라고 믿는다. 즉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는 것이다. 물론 자라난 환경이 그렇지 못해 그것이 나중에 표출되는 경우가 있거나 혹은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바뀌어가는 성격으로 인해 인생의 후기에 들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원론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더해 여기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이 매우 크게 작동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그럴 업적을 남긴건 기본적으로 타고난 머리가 있어서였다. 멍청한 사람은 백만년을 생각해도 상대성이론을 생각할 수 없다. 나 역시 상대성 이론 공식도 이해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우린 결국 어떤 종류의 스트레스를 참아내는 능력과 그 능력에 도움을 주는 타고난 유전자적 성능으로 인해 그 모든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물론 앞서 말했듯 아무리 잘 태어나도 환경이 도와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우리나라 같은 교육환경에서 자라면 정말로 뛰어나지 않는 한 그 한계를 넘어서기가 매우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자신의 삶에서 뭔가를 이루어내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일단 자신의 인내심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구성해줘야 한다. 술집 가득하고 놀꺼리가 가득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은 산속에서 혼자 할일이 하나도 없는 절에서 공부하는 것과 차이가 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우리의 본능은 아주 교묘하게 우리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본능으로 놀아나느 꼴밖에 안된다. 내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성취했더라도 그것은 그저 나 뇌가 주는 호르몬 분비를 잘 받아내려고 노력한 결과일 뿐이고 우연히 그것이 인간들이 위대한 일이라고 칭송하는 일이 된 것이다. 물론 운이 좋다는 점은 인정한다.
생명체는 생각보다 매우 단순한 원리로 작동되는 기관이다. 일단 생존, 그리고 번식. 이 두가지 목표를 위해 우리의 뇌는 진정으로 열심히 일한다. 자는 우리를 깨워 일하게 만들고, 일을 하고난 후 또 재충전을 위해 쉬게 만들고, 밤이 되면 회복을 위해 잠을 재워준다. 우린 졸리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뇌가 호르몬 조절을 통해 우리를 자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뇌가 나 자신의 뇌인건 맞다. 하지만 난 가끔 이 뇌가 나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도 든다.
우리는 단순하게 출발해서 복잡하게 성취한다. 그리고 이 복잡한 성취에 대한 이야기는 성공한 후에 급히 조합된 상황논리이다. 성공했기에 의미 있어지는 이야기란 뜻이다. 그리고 이 성공은 아주 소수만 맛보는 열매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린 또 미래의 주역들을 위해 이런 이야기를 신화화 시켜야 한다. 그래야 또 그들이 스트레스를 참아내며 우리 인간의 미래를 더 발전시키려 할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린 우리 아이들에게 왜 더 공부하지 못하는지를 묻고 삶의 성공은 우리 사회에서 가르치는 더 많은 돈을 얻은 삶이라고 알려준다. 물론 틀리지 않다. 돈이 많으면 나쁠게 없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거의 결정된 상태이다. 타고난 성격은 유전자에 포함되어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고 환경 또한 그것을 묻는 부모가 갖춰 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후천적인 성격 형성조차 부모의 삶에서 많은부분이 결정된다. 그런데 부모는 대부분 아이들을 설득하려 한다. 결정은 이미 거의 다 자신의 해놓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