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우린 왜 존재가치를 증명받으려고 할까?

아이루다 2013. 4. 7. 11:00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고자 내 생각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접근 할수록 점점 더 원론적인 문제에 다가선다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어 예전에 나는 행복하고 싶다는 욕구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왜 행복하고 싶어할까 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더해서 내가 행복한 것이 정말로 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가치일까 하는 생각까지 진행된 경험이 있다.

 

내가 만약 당연히 행복해야 할 권리를 지닌 존재라면 내가 행복하지 못함에 대해 많은 불만이나 문제점을 느끼겠지만 실제로 되집어서 하나하나 따져보면 당연히 행복해야 할 권리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내가 단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하는 존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했고 거기에 대해 나름 결론을 내렸었다. 그리고 최고의 선으로만 여겨지던 행복감 속에 숨어 있는 슬픈 진실도 보게 되었다.

 

얼마전에 문득 생각난 이와 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제목에서 밝힌 난 원론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를 가진 그 어떤것일까? 하는 생각의 단초를 떠올린 사건이었다.

 

지금껏 나는 존재가치 증명이 인간 생존에 매우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고 글을 적어왔고 또 다른 면에서 우리 개개인의 존재가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도 고민했다. 그런데 둘을 연결하니.. 첫번째 생각이 모래위에 지어진 성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존재가 의미가 없는데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존재가치를 찾아야 한다니.

 

밤하늘에 보이는 많은 별들.. 그리고 낮에 보인는 강력한 태양의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그 빛나는 하나하나의 별들이 얼마나 크고 또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지점을 지나 우주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한 크기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태양은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근원적 에너지 공급처인데 그런 태양이 우리 은하계에만 수천억개가 존재하고 그런 은하가 또다시 수천억개가 존재하는 우주.. 그리고 앞서나간 천체물리학자들의 이론에는 이런 우주조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멀티 유니버스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증명 안된 멀티 유니버스를 빼더라도 우리 인간의 범위에서 우주를 보면 정말 광대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우린 그곳에서 해변에 있는 하나의 모래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이건 우리 자신을 비하시키는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여기에서 이런 생각이 난다. 우주에서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는 우주를 인식하고, 약간 특이하게 우주를 사진으로 찍고, 우주에 대해 공부하고, 그 실체를 상상하지만 과연 그 우주 속에서 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재까지 연구로 밝혀진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 (얼마 전까지 137억년이 정설이었는데 이번에 유럽 우주국에서 발사한 플랑크 망원경이 찍은 WMAP보다 더 정밀한 우주배경복사 사진 판독에 의해 8천만년이 추가로 더해졌다) 인것에 반해 지구의 나이는 약 45억년 정도로 추정되고 거기에서 생명체가 탄생한 것은 20억년 전쯤이라고 알고 있다. 단세포에서 시작한 우리의 조상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변화를 거듭해왔고 다세포 생물을 거쳐 현생 인류의 지식을 갖출 수 있는 수준까지 진화를 이룩했다. 상상도 하기 힘든 20억년의 시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인 셈이다.

 

진화의 결정판은 아니지만 인간의 내부 기관이나 감각기관의 원리를 연구하면 과학자들이 놀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 정교함과 효율성이다. 그것은 20억년간 자연스럽게 환경에 적응하면서 제작된 원리가 없는 시행착오와 적응의 실체가 들어난 기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우리의 지식범주에서 그것을 보고 여기에서 신의 존재를 느낀다. 참 어이없는 착각이기도 하지만 또 그것이 인간의 불안하고 부족한 면이 불러온 단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0억년 동안 과연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을까? 아니 범위를 완전히 줄여서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현생 인류만 따져도 과연 얼마나 많은 숫자의 인간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지 또 미래에 시간동안 그것이 과연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상상할 수 있는 숫자일까?

 

그중에 하나인 나는 어떤 존재일까? 리처드 도킨슨씨의 설명처럼 나는 그냥 나의 유전자를 미래에 전달해주기 위한 중간자의 역할일까? 하지만 내가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내 유전자는 여기에서 그 존재를 중단하게 되는 것인가? 설령 내가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의 아이가 또 그 아이가 언제가 아이를 낳지 않는 순간 나의 유전자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하지만 어쩌면 우린 모두 하나의 유전자의 변종일 뿐 실제로 나의 유전자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예를 들어 여섯 세대만 지나가도 나와 그 존재의 관계는 그냥 나와 우연히 만난 옆집사람과의 관계만큼 정도 밖에 유전적 공통점이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내 존재 자체는 어떤가? 이런 글을 쓰고 나만의 생각을 하고 있는 이 고유의 특성. 과연 이것은 내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이고 그 누구와도 다른 존재란 것을 증명해주는 것일까? 물론 외모의 특이성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너무도 변종이 심해서 도대체 완전히 닮은 인간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외모와  다른 생각으로 인해 다른 인간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되는 것인가? 설령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일반적으로 인간은 그 스스로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하나 이상은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무너진 사람은 매우 심한 자괴감이나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삶이 매우 불행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존재감이나 자존감은 삶의 필수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린 서로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으며 연쇄적으로 다른 존재를 죽여서는 안되는 이유도 만들어 낸다. 반대로 생각해서 모두가 가치가 없는 존재라면 서로 언제든 죽인다고 해서 죄가 되겠는가?

 

그런데 그 서로의 가치를 따져보면 너무 주관적인 것이 문제이다. 자식에 필요한 부모, 부모에게 필요한 자식, 잘먹고 잘벌고 행복하기 위해, 나의 성공을 위해, 내가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니까,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 남을 돕기 위해, 공부하기 위해, 세상을 알기 위해, 뛰어난 업적을 남기기 위해, 국민을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많은 곳을 여행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 위해, 신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우린 살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정말 우리가 존재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단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존재 이유는 지구를 못 벗어난다. 대부분은 인간 범위에서 머무르고 좀 의식이 깬 사람은 그것이 자연으로, 기껐해야 지구 전체로 확장된다. 물론 더 깨어난 이들은 태양계를 위해 살아갈지 모르겠지만 보통 달을 위해, 수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시선은 정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지구에서도 결국 현시대, 앞서 생각해야 몇백년, 많이 나아가야 수백만년 수준이다. 지구는 45억년의 시간을 보낸 존재인데 우리의 사고는 우리 인간의 지식범주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따져보면,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든다면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로 하는 존재들을 위해 존재하다고 믿는 것 그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관계일 뿐이다. 이유가 되기엔 너무 상대적인 개념이다. 정말 이유가 되려면 절대적인 개념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이틈을 아주 잘 노렸다)

 

하지만 우린 오늘도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무의식적 환상을 품고 있다. 그래서 관계를 맺은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화내고 기뻐하고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뻐기는 것이다. 우린 스스로를 아주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여 스스로 존재할 필연적 이유를 만들어내고 자신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이라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건강하고, 돈많이 벌고, 맛있는 것 먹고, 좋은데서 자고, 가족끼리 화평하고, 늘 행복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주어진 권리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린 늘 욕심을 낸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행복한 권리가 있다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정말로 너무 과도한 자기 기만이 아닌가 싶다. 도대체 누가 그런 것을 보장해 주는가?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신이라고 표현하지만.. 글쎄 정말 이 우주를 만든 신이 있다면 정말 제정신이가 싶긴하다. 그냥 태양하고 지구만 만들어도 우린 현 상태와 아무런 차이 없이 살아갈텐데.. 왜 그 많은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는 나는 다를바 있을까? 아니다 나 역시 이런 글 나부랭이나 쓰면서 지적 허영심을 통해 스스로를 더 착각에 빠뜨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의식을 느끼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전혀 근거도 없는 것에 대해 너무도 명백하고 의심없이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에 어쩔줄을 모르겠다.

 

조금만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우린 정말 좀 심한 착각에 빠져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쉬운 예를 들어 보면 우린 일을 하고 돈을 벌지만 늘 그 돈이 적다고 느끼고 있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못먹게 되면 매우 이것을 싫어한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소,돼지,닭이 그 생명을 멈추는 것은 불쌍하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는 현실이고 만약 외계인이 와서 우리를 잡아 먹는다면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 문제는 이것들이 한쪽 입장에서 너무도 확고하다는 점이다. 우린 원래 진화의 원인이 되는 생존경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런 확고함을 가진게 아니라 이미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것 자체도 스스로 정당화 시켜 버린 것이다.

 

이젠 그 누구도 인간의 탐욕을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서로의 탐욕을 욕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 자신이 누릴 권리 역시 근거도 없으면서 스스로 탐욕이라고 칭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하루에 다섯끼를 먹는 사람을 하루에 세끼 먹는 사람이 돼지같다고 욕을 할진 몰라도 누가 도대체 하루에 세끼가 인간이 누릴 정상적인 식사라고 정해줬단 말인가? 하루에 한끼먹는 이가 보면 세끼나 다섯끼나 돼지같은 것은 마찬가지일 뿐이다.

 

우린 정말 조금 많이 겸손해져야 한다. 신이 우리를 만들어서 너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지구가 우리 인간의 것도 아니다. 우린 이 우주의 크기에서 보면 역시나 티끌만큼도 안되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태양이 매일 보내주는 에너지를 광합성이란 작용으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화학물로 변환시키는 식물에게 철저하게 기생하고 있는 지구의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다. 만약 태양이 이 에너지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다면 우린 1초도 안되서 망해버릴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던 과거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도 역시 이런 생각의 꼭지점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 개인이 마음을 편하게 먹고 살게 해준다는 사고적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 자신은 정말 받기만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오만함에 쌓인 비상적인 단계를 벗어나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그 모든 것에 고개숙여 감사할 줄 아는 존재로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믿음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완전히 승복할 때 내가 누리는 그 모든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권리가 모두 내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고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린 욕심이 줄어들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는 정상적인 존재화 될 수 있다는 희망도 존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존재가치를 증명받으려고 하는 시도나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권리는 모두 우리가 스스로를 지독한 이기적인 착각에 빠진 상태에서 요구하는 어리석은 욕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욕심이 있으나 이것을 억누르고 참고 견뎌내려고 하는 관점이 아닌, 내가 욕심이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으니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비슷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인식에서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타인를 기준삼아 상대적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후자는 나 스스로 느끼는 절대적 기준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후자의 생각을 제대로 받아드릴 수 있을 때 아마도 난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작은 힌트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