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진지함의 상처, 그것에 대한 생각

아이루다 2013. 3. 29. 11:26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이유로 타인과의 관계를 맺게 된다. 물론 의지적으로 맺어지는 관계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맺어지는 관계도 있다. 그 관계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개인과 개인마다 다른 형태로 이루어지며 인간이 다양하듯 그 관계 역시 사람 수만큼 다양해서 완전히 같은 관계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또한 이 맺어진 관계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해 나간다. 이것은 혼자 태어나 살아가는 삶을 살아간 신화와 같은 이야기 속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면 너무도 평범한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도대체 관계란 뭘까?
 
내가 정의하는 관계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보이지 않는 어떤 끈 같은 존재이다. 어떤 이들과는 두껍고 짧게 연결되어 가족이란 이름으로 통용되기도 하고 어떤 이와는 희미하고 긴 끈이 연결되어 오래된 동창생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끈 중에 희미한 것까지 다 따져도 평생을 사는 동안 수천 개가 넘기가 힘든 것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작으면 작은 수이고 크다면 큰 수 이지만 아무튼 우리는 끊임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운명을 타고 났기에 타인과 어쩔 수 없는 관계의 속성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여러 종류의 영향하에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 여러 가지 종류의 영향 중에서 오늘 나는 부정적 영향 중 하나인 '상처' 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아마도 살아오면서 타인으로부터 단 한차례의 상처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없다고 해도 실제로는 본인이 못 느꼈을 뿐,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일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다.  이렇듯 상처가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기에 상처에서도 범위를 좁혀서 '진지함' 으로 인해 받는 상처를 오늘 주된 내용으로 다루고자 한다.
 
'진지함'
 
요즘 이 단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된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부정적 의미로 고리타분함, 괜한 허세, 솔직하지 못한 마음 등이고 다른 의미는 잃어버린 것, 숨기고 싶은 마음, 숨막히는 감동 등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대한민국의 전체적인 사회 흐름을 생각했을 땐 우리는 서서히 그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TV는 사람들의 취향을 존중하는 매체이다. 즉 사람들이 봐야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작품이기에 당연히 사람들의 성향에 매우 민감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대수의 프로그램의 내용을 보면 오래지 않아 가벼운 것들이 시청자들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쇼 프로, 드라마, 토크쇼 등등 TV 시청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효자 프로그램들에서 나오는 연예인들에게 진지함이란 퇴출로 바로 연결된다. 그곳에 나오고 있는 연예인은 어떤 식으로든 간에 사람들에게 웃음을 줘야 한다.

 

물론 비극적 드라마 같은 장면에서 사람들의 슬픔을 자극하는 시나리오가 표출되기도 하지만 그것도 역시 가벼움을 동반한다. 시대의 아픔과 같은 깊은 슬픔과 분노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매우 가벼운 감정 저울질에 국한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약 더 깊은 분노를 표출하면 사람들은 보면 기분이 다운된다는 이유로 시청을 거부한다.
 
비슷하게 일반 사람들간의 모임도 마찬가지다. 어떤 진지함을 갖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보다 반대로 가볍고 재미있고 활기찬 사람들이 모임에서 훨씬 환영 받는다. 특히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그 현상이 심해져서 요즘은 세 명만 모여도 진지함이란 절대 존재하면 안 된다.

 

심지어 이젠 두 명이 있어도 각자 스마트 폰을 바라볼 수 있기에 그다지 진지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자신의 스마트 폰을 바라보다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공유하고 재미있게 웃어주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래 이렇게 진지함을 피해가는 존재였을까?
 
생각해보자. 원래 우리가 그런 존재였는지.
 
내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도 나는 그 진지함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어쩌면 지금은 내가 더 진지해지지 못해서 그것이 불만이기도 하다. 물론 나를 잘 아는 후배는 나에게 너무 진지하다고 가끔 타박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내 기준으로 보면 난 너무 가볍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벼움이 나를 좀 더 편하게 해주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진지함을 잃어버린 사건에 중심에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가 큰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내가 내 친구에게 진지함으로 대했을 때 내 친구가 그것을 장난스럽게 받아서 무시해버리거나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만큼의 관심이 없는 태도로 대했을 때 그런 부분에 대해 스스로 서운함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닫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절대 친구의 잘못이 아니다. 왜냐면 누구나 사람은 자신이 관심이 있는 것,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자신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고 거기에 따라 우린 자신의 신경과 시간이라는 모자란 자산을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내 친구에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당연히 입장 차에 따른 상처를 주고 받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물론 이 경우엔 그나마 선의적 의도를 가진 상처이지만 살다 보면 제대로 악한 의도의 상처도 많다. 돈을 꿔준 친구의 배신, 연인의 외도, 부부의 거짓말 등등이 그런 종류의 대표적 예이다. 결국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어 상처를 입고 또 입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는 그런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두꺼운 벽으로 자신과 남의 관계의 사이를 막아버리는 일을 하고 살아간다. 내가 살기 위해 남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물론 이 동일한 상황에서도 다른 해결책을 내놓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가면서 개개인으로부터 받는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강한 정신력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 역시 내부적으로 들어가면 수 많은 상처가 있지만 너무 많아서 실제로 한 줄의 추가적인 상처가 생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린 자주 보지 못하는 친구와 오랜만의 통화에서 '그래 담에 식사 한번 하자' 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그 친구나 나나 다음에 식사할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정말로 다음에 식사를 할 친구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날 그 친구 근처 집에 가서 '지난번 식사 한번 하기로 했으니 지금 나와서 식사하자' 라고 말하면 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대로 친구에게 줄 좋은 선물이나 즐거운 소식이나 이익과 관련 된 일이 있어서 방문하여 밥을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와 식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들은 내 오래된 친구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이득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로 보낸다. 그것은 직장 동료이고, 동종 업계에 있는 옛 직장 상사이고, 혹시나 미래에 있을 사업을 같이 하게 될 파트너이기도 하다.
 
물론 집에서 살림을 하는 여자들은 좀 다르겠지만 역시나 마찬가지다. 아이를 같이 키우고, 시장에 같이 갈 수 있으며, 생활 정보를 공유할 사람이 내 오래된 친구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이가 된다.
 
관계에 있어서 진지함을 없애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온라인이다. 온라인은 '로그인' 과 '로그 아웃' 이라는 매우 효과적인 온/오프 장치가 있다. 즉 삶으로 따지면 언제든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발달한 것들이 바로 SNS 라고 부르는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목적의 회사 제품들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카페, 카톡, 마플과 같은 메신저 등이 모두 그런 목적의 제품들인 것이다.
 
진지함이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은 의무감이나 책임감 같은 것이 없다는 말도 된다. 그것은 바로 내가 관계에서 딱히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된다. 이것은 우리가 관계를 그 관계 자체로만 즐길 수 있는 혜택을 주는데 그러기 위해 이 관계는 철저히 재미와 흥미 위주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서 결국 우린 늘 진지함을 제거한 대화에 열중한다.
 
물론 사회적 이슈나 혹은 정치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도 꽤있지만 실제로 그것 역시 진지함 보다는 이슈와 관심거리에 대한 공통적인 반응이라고 봐야 옳다. 여기에서도 진지함보다는 사람을 끌어내는 구호와 사건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진지함이 사라진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밝고 명랑하고 즐겁고 상큼한 사회일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왠지 이 진지함이 사라지면 내가 사라질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도 이 진지함이 사라진 관계라면 온라인 관계처럼 저 사람이 혹은 내가 오프라인이 되자마자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관계처럼 되어버릴 것 같다는 걱정이다.
 
우린 살아오면서 경험적으로 이 진지함의 상처를 이겨내고자 스스로 극복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아직도 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답답함과 왜 저렇게 진지하게 살아갈까 라고 의문을 갖기도 한다. 세상을 좀 재미있게 그리고 가볍게 살아가지 왜 별 필요도 없는 진지함으로 일관할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진지함을 몽땅 빼버린 삶에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떤 목적성이 생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모든 것이 언제든 스위치를 통해 켜고 끌 수 있는 것들이라면 뭐 하러 그리 소중하게 여길 것인가. 간단히 예를 들어 각 가정의 아이들의 가치는 그 부모가 아이가 태어난 후 쏟은 정성의 계량으로 환산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완벽한 진지함이기도 하다.
 
어떤 장인이 10년을 들여 만든 제품과 공장에서 10분만에 뽑아낸 제품이 비록 똑같다고 해서 우린 장인이 만든 작품을 별것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가 그런 작품을 소중히 여기는 데는 그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진지함에 대한 평가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이며 우리를 좀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허공에 뜬 것일 지라도 말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세상은 점점 더 이 진지함을 잃어가게 될 것이다. 우린 그리고 결국 최소화된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그 잃어버린 진지함에 대한 회복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잃은 것이 그리 빨리 진행된다면 정말로 회복이 가능할까? 그것은 지켜봐야 할 일인 것 같다.
 
 내가 진지함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이미 글을 써내려 오면서 충분히 설명을 했다. 그래서 난 앞으로도 진지함에 집착을 할 것이다. 단지 여기에서 문제는 내가 진지해질 대상이 될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어쩌면 나는 어떤 장인들처럼 내가 만들어 가는 결과물에 더 집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두렵기도 하지만 또 놓고 싶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