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질.. 행복과 고통 사이
아주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에 대한 질문을 받게될때 아마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설령 이렇게 선뜻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아마도 본인이 살아가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그 모든 행위의 근간엔 언제나 자신의 행복이라는 결정적 기준이 있음을 잠시만 생각해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매일 먹는 음식 하나를 고를때도 그 음식을 통해 내가 어떤 만족감을 얻어서 행복해질까 고민을 한다.
그런데 아니러니하게도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행복하지 않아서라면 이것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이미 행복하다면 행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란 뜻도 포함하고 있다. 그건 마치 목마른 자는 물을 찾지만 이미 충분히 물을 섭취한 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이면 역겨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미 가진것에는 추가적인 욕심내지 않는 것이 보통 인간의 심성이라 여기면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린 행복을 갖지 못했기에 행복을 추구한다. 물론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 행복한 사람은 더이상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될지 모르지만 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미래도 행복하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우린 지금 당장 행복하더라도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에 또 가까운 미래에 노력을 한다.
그래서 현재가 좀 불행한 사람은 더 노력을 하게 되고 현재가 행복한 사람은 덜 노력하게 되는 결과도 생겨 우린 늘 행복에 대한 성취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게 된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우리가 과거에도 현재에서 미래에도 끝없는 행복에 대한 추구를 하는 이유가 바로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우리 삶의 본질은 불행함 즉 고통이라는 결론으로 확대해석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본질은 고통이나 불행함인가?
아닌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린 늘 행복을 추구하기에 행복해 하는 시간이 더 많다. 그리고 세상은 행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맛난 먹거리, 재미난 볼거리, 대화의 시간, 음주가무, 스포츠, 취미생활, 흥미를 끄는 제품들, 멋진 자연풍경, 예술 등등 모두 우리의 행복을 높여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우린 이것을 얻고 즐기기 위해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본질은 역시 행복인가?
이것도 아닌것 같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행복하다면 우리가 왜 행복을 추구하는가? 공기중에 산소가 이미 가득차 내가 호흡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면 내가 이 산소의 존재를 알아채기나 하겠는가?
답을 내리기가 매우 힘든 질문이고 이것을 결론내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철학이란 학문으로 혹은 사유하는 삶을 살았던 소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 해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쾌락(행복)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고통과 번뇌라고 했다. 그리고 각자 자기들의 주장하는 논리에 따른 대책에 마련하고 추구하는 삶의 모습에 대한 비전과 방향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나는 다른 한가지 과학적 사실로부터 이 문제에 접근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엔트로피이다.
일전에 내가 엔트로피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엔트로피는 무질서도로 해석되며 이것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조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 중 하나이다. 쉽게 예를 들면 깨끗히 청소한 집안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러워지는 것이 바로 엔트로피가 증가된 것이다. 즉 집은 무질서도가 증가된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바로 이 무질서도가 증가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이를 지키거나 혹은 더 질서있게 하려면 무조건 추가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실제로 지구의 엔트로피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태양의 에너지이다. 우린 이 에너지로 부터 만들어진 우리가 섭취가능한 에너지원을 통해 다시 내 몸안에서 에너지를 변환시켜 몸을 유지시킨다. 하지만 인체 역시 엔트로피 증가를 거스르지 못하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대충 엔트로피에 대한 이해가 되었다고 믿고, 왜 갑자기 행복과 고통에 대한 본질에서 엔트로피로 넘어왔는지 이제부터 설명하도록 하겠다.
쉽게 설명하면 공든탑은 쌓기보다 무너지는게 훨씬 쉽다. 건물을 지을 땐 1년이 걸려도 허물고 치울땐 겨우 며칠이면 된다. 이런 일은 세상에 모든 것에 적용이 된다. 내가 30년간 꾸준히 운동을 해서 여느 병에도 걸리지 않는 튼튼한 몸을 만들었다고 해도 교통사고나 비행기 사고 한번 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즉 우린 언제라도 수십년, 수백년, 수처년의 노력을 일시에 망가뜨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공룡은 수억년에 걸쳐 지구를 지배했지만 6500만년 전 유차칸 반도에 떨어진 지름 10km 짜리 운석 한방에 거의 대부분 멸종하고 말았다. 지금 현재 지구는 포유류의 전성시대이고 또한 그중에 인간이라는 탁월한 두뇌용량이 가진 영장류가 상상도 못할 과학기술력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있지만 이것도 저런 운석 한방이면 모조리 단 며칠사이에 먼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구가 두개로 뽀개질 수도 있다.
우리는 보통 엔트로피를 줄이는 행위를 생산적 행위라고 말한다. 음식을 하거나, 건물을 짓거나, 집청소를 하거나 뭔가를 만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엔트로피를 낮추는 행동들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 다른 생명체로 부터 얻은 영양분을 통해 생산된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경제적 도움도 주고 먹고 마실 수있는 생존의 기본 행동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엔트로피는 그냥 놔두면 증가되는 방향으로 간다. 청소를 안하면 깨끗해지진 않아도 더러워지지도 않아야 좋은데 그냥 더러워지는 방향으로 가버린다. 그러니 우린 또 에너지를 써서 청소를 해야한다. 그것은 매우 주기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청소같은 것은 보통 누구나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엔트로피가 증가됨은 우리가 고통스러워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소모되고 더러워지고 지저분해지며 낡아서 사라져간다. 우린 이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한다.
운동은 몸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행위이다. 직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우리의 몸에 에너지를 주입시킬 영양원을 구매하는데 도움을 주고 우리가 각종 위험한 환경으로 부터 노출되는 상황을 최소화 시키는데 목적을 갖는다. 즉 몸의 엔트로피가 급격히 높아지는 각종 사고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집과 옷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매일 매일 배우는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가기에 늘 새롭게 또 배워야 하며 이것을 위해서 또 에너지가 투입된다. 즉 우린 늘 엔트로피 감소나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이것은 마치 흐르는 물을 가로막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냥 물을 타고 흘러가면 물의 흐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물길 안에서 버티거나 혹은 거슬러 올라가려면 순응하면서 흘러갈때에 비하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해진다. 이 에너지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가꿔야 겨우 조금 얻어진다.
그러니 우리가 제자리에 머물거나 혹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하겠는가?
단순히 계산해서 우리의 삶이 죽음을 그 끝으로 본다면 엔트로피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흘러가는 흐름을 보게 된다. 우리의 육체는 단 두개의 세포의 결합으로 시작되어 엄청나게 불어난 세포 수를 자랑하다가 그 세포 모두가 죽어 썩어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우린 그 중간에 끊임없는 에너지원을 섭취하면서 최대한으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막으려 애쓰지만 결국 오래 버텨야 100년을 살 뿐이다. 100년이 지나면 우리의 몸을 지탱하던 그 내부 기관까지 모두 엔트로피가 한없이 높아져 이제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것에 거스를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는 근본적으로 고통을 깔고 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가만히 있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삶이란 뜻이다. 가만 있으면 엔트로피가 증가되듯이.
그래서 우린 행복을 추구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총 동원해서 엔트로피 증가를 막는다. 그것을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표현한다. 우린 그럼으로서 즐겁고 행복해진다. 우리의 두뇌는 우리가 엔트로피 증가를 늦추거나 줄였다고 판단하면 거기에 대한 상을 준다. 바로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이다.
그래서 우린 열심히 일한 후, 운동한 후, 목적을 달성한 후, 음식을 먹은 후, 즐겁게 논 후 늘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 행위 모두 엔트로피를 낮추는데 직간접적으로 간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답은 너무도 쉽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면 된다. 반대로 만약 삶의 본질이 행복하다면 그냥 살면 된다. 마치 마약을 한 후 몽롱한 세상을 끝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대로 살면되는데 문제는 마약은 언젠가 깨야하며 또 다시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은 누구나 공짜로 얻을 수 있는게 아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행복은 늘 깨어지며 고통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우린 그 고통을 잊거나 극복하기 위해 또 열심히 노력을 해서 다시 행복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또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에 또 다시 노력을 반복해야 한다. 마치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는 행복이 찾아오지만 하지만 몇시간만 있으면 또 배가 고파지는 고통이 찾아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밥을 먹기 위해선 돈을 벌거나 요리를 하는 수고를 해야하지만 배가 고파지는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단지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
여기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두가지 해결방안이 있다. 첫째 하나는 고통을 잊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세상엔 그런 방법은 무수히 널렸다. 왜냐면 이것이 고통을 이겨내는 두개의 방법 중 훨씬 쉽기 때문이며 이것을 우린 행복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잊기 위해 우린 늘 뭔가를 한다. 영화를 보고, 책을 보고, 대화를 하고, 먹고, 마시고, 여행가고, 사랑을 하고, 친밀감을 느낀다. 이것들은 모두 행복이란 이름으로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고통을 잊은 방법론 중 하나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매우 하기 어렵지만 그 고통의 본질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힘들고 과정에서 고통이 크다. 고통이 느껴지는데 진통제를 처방받지 못하면 그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본질적 가치와 자신의 부족함 등등을 느낄 때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들 눈을감고, 딴것을 보고, 도망가고, 핑게대고, 합리화 하며, 남탓을 한다. 내가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과정의 연속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간다.
예로부터 현인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이야기해왔다. 자신의 본질에 대한 직시, 고통에 대한 자각을 말하면서 당장은 피해갈 수 있으나 해결책은 되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왔다. 그들은 그래서 선각자로 불렸으며, 현자라고 불렸고, 선구자라고 칭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위대한 인간의 반열에 올랐다.
고통에 대한 두번째 대처는 매우 힘든 과정이라서 정말 소수만이 그러한 삶을 살아간다. 나 역시 이제 겨우 그 말의 의미 정도나 깨달은 단계이다. 그리고 솔직히 죽는 그 순간까지 내가 그들이 말하는 삶을 조금이나마 맛볼지도 매우 큰 의문이다.
그래도 삶의 본질이 행복은 아니라는 근본적인 착각에서 깨어남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