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이루다 2013. 1. 29. 20:36

 

인생이란 길면 길고 짧으면 한없이 짧은 여정에서 이제 막 반 정도의 시간을 보낸 나로서 지나온 살아온 삶이나 혹은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의 시간에 대한 생각의 깊이는 어쩌면 내 일반적인 상식보다도 훨씬 복잡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살것인가' 에 대한 깊은 고민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화룡정점 이란 한자성어가 있다. 용의 눈동자를 그린다는 고사인데 죽음이 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려야 할 눈동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에 대해 내가 과연 제대로 살았느냐? 혹은 내가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성공했느냐 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산다는 것의 진정한 본질을 깨달은 이는 내가 정말 행복하게 살았느냐를 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평범한 질문이 될 수 있는 당신은 삶을 성공적으로 살았느냐에 대해 각자는 모두 현시간을 기준으로 대답을 하게 되어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 순간에 내가 성공적이라면 성공이고 실패라고 여기면 실패가 되는 것이다. 인생사 자체가 세옹지마이기 때문에 사람에겐 늘 성공과 실패의 굴곡이 있기 마련이니 어쩌면 그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겠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우리가 그 질문에 마지막 답을 내리는 날이 언제일까?

 

그것이 바로 죽음의 순간이 된다.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 살았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실제로 보면 죽음은 너무도 당연한 생명체로서의 운명인데도 우리 인간은 그 죽음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긴 하다. 매우 관념적인 사고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란 말은 우리 인간 세상에서 꺼내면 안되는 말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본질을 좀 더 잘 생각해보면 죽음 그 자체가 갖는 의미에 집중해서 평상적으로 생각되는 그 단어가 가진 순수한 공포를 벗어나 좀 더 높은 단계의 이해가 가능하기도 하다. 아니 실제로는 그런 단계까지 가기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죽음은 생명체에게 있어서 진정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말 다양하게 죽는다. 늙어 죽고, 병들어 죽고, 사고나서 죽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스스로 죽고, 원인도 모르게 죽고, 죽는줄도 모르고 죽고,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는다.

 

그렇다면 이런 죽음은 어떤가?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비분을 한몸에 지고 떳떳하게 그 죽음을 맞이한 안중근의사나 윤봉길의사.

 

죽는 그 순간까지 한점의 후회도 없이 그 무거운 두려움을 스스로 이겨낸 분들이다. 솔직히 나는 이분들의 죽음이 부럽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 단 한점의 부끄럼도 없는 삶이라고 자부할 수 있지 않는가?

 

또 다른 죽음이 있다. 비록 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죽을 각오로 세상을 향해 외치는 짧고 굵게 살아간  4.19나 부마민주화 운동,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군부 독재자에 맞서 싸우던 그분들.

 

노동계의 현실을 알리고자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고 떠난 전태일 열사.

 

물론 이런 거대한 담론이 아닌 작고 소소하게 그 삶을 마감하면서 타인들을 위해 그가 가진 것들을 내놓고 떠난 분들도 많다. 그것을 내가 일일히 알고 기억하기란 거의 불가능 하지만 오늘도 어느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남을 위해 남겨두고 떠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늙으면서 추해지기 쉽다. 최근에 '타는 목마름으로' 라는 시로 민중의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김지하'의 정말 추해진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절실히 느끼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가 대한민국 평균 수명을 살게 될 때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나는 솔직히 말해서 죽음 자체가 두렵긴 하지만 만약 죽는다면 좀 당당하게 죽고 싶다. 또 그럴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해 죽음은 매우 두렵다. 그것을 속일 순 없다. 그렇지만 내가 죽을 확실한 이유가 주어지고 그것을 내가 받아드릴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라도 죽음을 각오할 순 있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받아드릴 수 있는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정말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위해서 죽으라면 죽을 수 있다. 이것은 그냥 말하는 만용이 아닌 내가 스스로 가치있는 죽음이라고 여기는 행복한 죽음이다. 어쩌면 내가 맞이할 최후의 모습 중 가장 후회없고 당당한 죽음이 아닌가 싶다.

 

나는 지금 일제 강점기와 같은 절대적 가치관이 존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그때는 그냥 일본군과 싸우면 그것이 내 삶의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런 단순한 논리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가진 가치관으로 절대적 가치를 갖는 대상을 찾기가 너무도 힘들다.

 

세상이 다변화 될 수록 가치관의 다양성은 점점 더 심해져간다.

 

어쩌면 그런 단순한 가치관에 의해 혼란스럽지 않게 '정의' 나 '옮음' , '가치' 등을 판단 할 수 있는 시대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훨씬 쉬웠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것도 옳은것 같고 저것도 옳을것 같으면서도 틀린 구석이 눈에 보이는 이 시대에 과연 가치 있는 죽음이란 존재할 수나 있을까 모르겠다.

 

나에게 행운이 따른다면 스스로 인정할 만한 죽음의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혹은 내가 그냥 늙어서 죽거나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죽음에 대한 진정한 받아들임을 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스스로 달라졌으면 한다.

 

내 미래의 어느날 죽임이 찾아 올 때 말이 아닌 진심으로 삶이 가진 본질적 의미인 태어나고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체 본연의 운명에 대해 한점의 의심없이 그리고 욕심없이 이해하고 승복하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내인생의 마지막 행운이 따른다면 내가 죽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