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들
오늘 하우스 시즌 8을 모두 보았다. 이 글에는 하우스에 대한 결말이 적혀 있으니 혹시 미래에 볼 계획이 있는 분들이라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우스는 쉽게 말하면 속이 꼬인 천재형 진단 전문 의사이다. 다들 그를 싫어하기도 하고 또 다들 그를 동정하기도 하며 또 놀랍게도 다들 그를 가끔 존경하기도 한다. (존경하지 않는 점이 내가 가장 의아한 점이다. 그정도의 실력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병실에서 똥을 싸도 새로운 치료법이라고 배운다고 호들갑 떨었을 듯 하다)
시즌 8 후반부에 그의 단 하나뿐인 친구 윌슨이 암에 걸린다. 그리고 모두가 말리는 강력한 화학요법을 시도하지만 결국 암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고 그래서 치료하지 않으면 5개월 치료를 해도 1년 정도의 최종 진단을 받는다. 여기에서 윌슨은 치료를 포기한다. 그 역시 암 전문가 의사였기 때문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또 낭비가 될지를. 물론 하우스는 그런 윌슨을 설득하기 위해 하우스적인 방법을 시도한다. 속이고 어르고 달래고..
윌슨은 하우스에서 자신을 편하게 보내달라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 윌슨은 평범한 사람이긴 하지만 결국 그도 가족 하나 없는, 결혼을 세번이나 실패하고 친구가 하우스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우스는 그런 윌슨에게 자신을 위해 더 살아달라고 하지만 결국엔 윌슨의 결정을 받아 들인다. 그리고 하우스는 윌슨이 죽은 후의 자신의 삶에 대해 절망을 느낀다.
닥터 하우스 란 미드에 하우스는 미국내 최고의 진단 의학 전문가이다. 그러니까 그가 못하면 누구도 못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는 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하지만 다리 수술을 잘못해 평생을 절룩거리면서 바이코딘 이라는 일종의 진통제를 끊임없이 먹고 산다. 그리고 그후로 세상에 염세적이고 또 삐뚤어진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인간의 가치를 정의하는 것들을 우숩게 보고 비웃으면서 또한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 동료들은 맹렬하게 하우스를 비난하지만 결국 많은 부분에서 하우스의 판단과 선택이 옳았음을 끊임없이 증명 받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우스의 가치관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적어도 그가 생명을 살리고 있다는 것 하나만 동의할 뿐이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미국내 최고의 의사가 친구의 죽음 후 자기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에 빠진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그 정도 능력과 연봉이면 같이 살아 줄 여자들이 줄을 서도 몇 킬로미터는 될 법 하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하우스 앞에 줄서는 여자는 오직 창녀들 뿐이다. 드라마가 실제이든 허구든 간에 상관없이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 미국이란 나라의 가치관에 커다란 경외심을 느낀다. 그들은 적어도 돈과 행복을 동일선상에 놓는 가치관만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는 아니다.
내가 만약 5개월의 시간이 남았다면 혹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 5개월의 시간만을 남겨두었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우스에서 마지막 장면은 하우스와 윌슨이 오토바이를 타고 어딘가로 끊임없이 떠나는 여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우스는 여러가지 상황을 보낸 후 죽어 장례식까지 치뤄진 사람이었고 윌슨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우정은 그렇게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마무리되었다.
5개월 후 윌슨은 떠나겠지만 남은 하우스에겐 이젠 의사란 직업도 윌슨이란 친구도 없을 것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장례식이 치뤄진 죽은 존재니까 말이다. 대신 그는 절대적 자유를 얻긴 했다. 이제 어디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그는 더이상 하우스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5개월 후 하우스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만약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여자친구가 5개월의 삶밖에 없다고 하면 나는 현재 내가 가진 모든것과 내 미래를 모두 접어두고 현재의 5개월에 아무런 고민없이 집중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떠난 후의 시간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지 않고 지금 내 옆에 있는 그사람을 위해 내 삶 자체를 모두 바꿔버릴 용기가 있는가 라고 생각해봤다. 누군가는 만용이나 혹은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과연 살 사람은 살아야 하나?
물론 내가 애가 없고 또 책임져야할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 8살짜리 딸이 있고 또 그 존재를 내가 지극히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나의 여자의 5개월은 미래의 나의 아이를 위해 또 남겨둬야 할 부분의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온전히 나의 소중한 이에게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소중한 것이 둘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라면?
솔직히 말해 하나라도 자신이 없다. 감정적으로야 무한대로 뻗어나가겠지만 인간인 이상 어떻게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가 느끼는 이 갈등의 부분을 이겨낸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기질과 성격이 그런 것이다. 딱히 계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위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무식하다는 뜻은 아니다) 계산을 별로 할 줄 모르고 계산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면 5개월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현재의 5개월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도 꽤 된다.
좀 더 생각해보니 나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소중하기에 나를 통채로 바꾸는 것에 대해 지극히 방어적이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진지하지 못한 사람인가?
하우스는 직업도 미래도 실제로 자신의 삶 자체를 자신의 친구 윌슨을 위해 모두 포기해버렸다. 물론 5개월 후 하우스 모습이 기대되기도 하지만 이럴만한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 쉬울까?
우린 내가 어떤 상황에 빠지지 않게끔 하거나 또한 해야 할 일에서 벗어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늘 변명을 늘어놓고 그것이 자신을 용서하게 하는 과정을 타인들의 의견에서 혹은 소리내어 기도하는 기도문에서 얻어낸다. 이렇게 정화된 양심은 그 후 내가 가진 그 어떤 것에 대한 판단도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살아간다. 그렇게 단단해져 간다.
하우스는 자신의 삶의 위해 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윌슨과 그냥 병원에서 5개월을 보낼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상황이 꼬이고 또 꼬이면서 죽어버린 살아있는 하우스가 되었지만 말이다. 아마 그런 상황이 아니라도 그는 윌슨이 원하면 그렇게 떠났을 것이다.
드라마이다. 어떤 작가가 썼고 어떤 배우가 연기를 한 작품이다.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 중 제일 좋은 것은 나에게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고 또 그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과연 내가 뭐하고 100살까지 살아갈 걱정을 하면서 내 삶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야 한단 말인가? 그냥 지금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내 삶 그 자체를 모두 쏟아 부울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갈 자신이 생겼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어떻게 살고 또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중요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죽고나서 몇 십년만 지나도 나를 기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텐데 말이다.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아 내 삶에 대한 바보같은 미련과 평가에 신경쓰고 살아가고 있었던가.
온전히 나의 삶 속에서 살아가기.. 매우 어렵고 힘들지만 그것만이 내가 어떤 경로로 죽든 그 죽는 순간에 스스로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