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산다는 것은 답이 있는 질문인가?

아이루다 2012. 3. 31. 09:54


수학이나 물리같은 학문 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그 학문의 원리 이해를 요구한다. 물론 역사나 영어와 같은 암기과목으로 일컬어지는 것들조차도 원리 이해를 기반으로 할 경우 더욱 더 좋은 성과를 낸다. 그래서 실제로 해당 과목을 잘하는 이들은 단순한 암기식 공부방법 보다는 그 원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 우리가 직각삼각형의 빗변 길이를 계산하는 피타고라스 원리를 실생활에서도 써먹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국가시험을 준비중이라면, 특히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중이라면 반대로 원리 이해보다는 출제문제 중심의 공부가 훨씬 효율적이다. 물론 여기서 효율적이란 말은 자격증을 따는 목적에 대한 효율성을 말하는 것이지 지식의 습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불필요한 많은 지식을 외우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시험이 이렇다.


인간이 길게는 백년 짧게는 몇십년에 걸쳐 살게되는 인생이란 주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일까? 학문을 대하듯 그 원리를 하나하나 이해하면서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이미 타인들이 살아간 인생을 기출문제로 삼아 참고하여 도움이 되는 것만을 취해 목표에 빠르게 달성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인생을 시험공부 하듯 살수는 없다. 자격증 시험에 나오는 기출문제는 끽해야 몇백, 몇천개에 불과하지만 인생에서 알아야 할 기출문제는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그래서 우린 보통 인생을 공부한다고 말할 때는 자격증이 아닌 원리공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보통 시험을 보듯 인생을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미 인간세상이 이루어놓은 지식을 전달받고 이미 정해진 과정에 의해 공부를 하며 또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과 관념속에서 자신이 가치관을 만들어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고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고 늙고 죽는 것이 우리 삶의 기출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출문제를 보지 않고 원리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이 나름 주관적인 삶의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인간이 문명을 이룩한 후 5천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우리에게 과연 인생에 대한 원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실제로 그 원리는 없는 듯 보인다. 수학과 물리가 가진 피타고라스 정리나 상대성 이론과 같은 제법 그럴듯 하고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그 학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반면 우리의 삶에서는 아주 부분적인 답이나 심지어 오답까지 버젓히 정답인냥 세상에 나와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가 어디선가 구한 답을 정답 내지는 정답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살아간다.


역사적으로 보면 삶에 대한 답을 내린 사람은 실제로 많지 않다. 이들은 보통 성현들로 칭해지면 종교를 창시한 인물이며 또한 상당히 인류문명이 역사속에서는 초반부에 나타난 것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많은 지식이 쌓이기 전인 문명의 초반부에 나타났기 때문에 현재의 권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후로도 많은 철학자들이 나름 자신만의 시각으로 삶을 조명하고 분석하고 답을 내리려고 했으나 훗날 그들의 저서를 통해 생각을 읽어보면 넓어진 지식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너무 좁은 범위에서만 삶을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특별하게 철학을 공부한 일도 없고 또한 삶을 깊게 사유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단지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궁금해 왔으며 삶이 가진 비밀을 궁금했으며 존재로서 나의 가치를 알고자 했고 그리고 우주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되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많은 책은 아니지만 나름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점점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물론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무관심해진것도 아니고 어쩌면 더 관심이 많다. 생각을 해보면 인간의 기본 생활이 보장되지 못하면 정신적 활동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나의 정신적 활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고자 기본적인 삶의 물질적 형태를 갖추고자 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보편적 관심사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외로움을 말한다. 재미있게 나눌 대화의 주제도 없어지고 사람을 만나는 재미가 젊은 시절에 비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사람과의 소통은 인간이 느끼는 행복에서 아주 큰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 부분을 빼니 많이 허전한 것이다. 거기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행복마져 포기해 버렸으니 나에게 과연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행복이란 어떤 것이 남아 있을지가 의문이다.


삶을 알기위해 사실을 알고자 했고 진리를 탐구했지만 그래서 나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또한 그것들을 통해 내 생각과 행동의 본질적 가치를 알아내고자 했고 실제로 예전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것은 진리를 알게된 기쁨보다는 그것들의 의미없는 가치에 실망만을 더 하게 되었다는 점이 아니러니하다.


예를 들어 상대성원리를 알고자 수학을 공부하고 공식을 이해하고 그 생각을 한 과학자의 생각을 이해했지만 지식을 이해하게된 즐거움이 아닌 우리 인간 개개인의 가치가 우주에서는 바닷가 모래알만큼의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된 상황이랄까?


과연 나는 무엇을 알고자 했으며 또한 왜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그 내용을 확인하고자 했을까? 


실제로는 그 답조차 존재하지 않는 질문을 하면서 타인들의 생각을 읽고 내가 믿던 것들을 의심하고 또 의심없이 살아가는 다른 사람과 나 사이의 단절감을 느끼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과연 나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과정인 것인가?


이 글의 제목을 산다는 것은 답이 있는 질문인가 라고 정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내가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답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미 난 뚜껑을 열어버렸고 그 내용의 일부를 확인한 상태이니 이제 절대로 뒤로 되돌아 갈수가 없다. 물론 더 많은 시간이 흘러 내가 좀 더 현명해지는 날이 온다면 이미 열어놓은 뚜껑을 닫을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으리란 희망은 한다. 하지만 지금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과연 진심으로 뭘 알고자 하는가? 삶에 대해 아니면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인간이란 존재의 우수움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래서 나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타인의 어리석은 모습을 바라보며 비웃고 살고자 하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더 행복해지는 것인가?


지금껏 꽤 많이 본질에 근접했다고 스스로 자부를 했었나보다. 아직도 난 갈길이 멀어보인다. 심지어 못갈것 같다는 두려움도 심하게 든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생각하면 수십년을 고민해왔지만 아직도 내가 뭘 찾고자 하는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질문도 이해를 못하는데 답을 어떻게 낼 것인가?


토요일 아침 차갑게 식어버린 드립커피 한잔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