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단편] 변두리 삶 #2

아이루다 2021. 3. 20. 07:58

* * *

 

나는 온 몸이 밧줄로 의자에 묶인 채 어두운 공간에 갇힌 채 정신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잠들기 전에는 병원에 있었는데, 잠을 깨고 보니 이런 이상한 장소에 와 있다. 더군다나 나는 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비록 밧줄에 묶여 있긴 하지만, 사지에서 감각이 확실히 전달되어 왔다. 손을 꼼지락거리고, 발을 살짝 돌리고, 고개도 돌릴 수 있었다. 눈도 뜰 수 있어서 바깥세상도 보였다. 하지만 내 머리 바로 위에 켜 있는 조명이 너무 밝아서 주변 것들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코끝으로 곰팡이 냄새와 희미한 비린내가 섞여서 났다. 피부에는 축축한 느낌이 올라왔다. 잘 모르겠지만, 어떤 창고인 듯 했다. 대충만 둘러봐도 낡고 더러운 곳이 분명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나는 왜 식물인간이 아닌 것인가? 설마 내 마비 증상이 치료된 것일까?

 

순간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어떤 불쾌한 감정 하나가 스멀스멀 밀려 올라왔다. 바로 공포심이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또 왜 이런 공포심이 들지? 그 순간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다. 나는 내가 살던 고시원 앞에서 빚쟁이들에게 잡혀서 여기에 끌려 온 것이다. 하지만 왜? 나는 분명히 돈만큼은 넘치도록 많았던 사람이었다. 운 없게 사고로 인해서 몸이 마비된 상태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빚을 지고 이런 장소에 묶여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아마도 또 그 꿈을 꾼 것이 분명했다. 내가 엄청난 재벌이 되는 꿈이다. 내가 너무도 많은 돈을 가져서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꿈이다. 평생 근처에 가보지도 못할 집에서 살고, 평생 핸들조차 잡아보지도 못할 비싼 차를 몰고, 내 삶에는 어떤 인연도 없을 법한 예쁜 여자 친구와 사귀는 꿈이다. 그런데 문제는 꿈 속에서 식물인간 처지이다. 빚쟁이에 끌려 온 현실과 사고로 온 몸이 마비된 꿈 속은 서로 다른 이유로 불행했다. 그런데 신기한 면이 있긴 하다. 분명 꿈인데도 불구하고 꿈마다 분명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흔한 악몽처럼 꿈을 꿀 때마다 어떤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꿈 속 세상의 시간이 흘러 있다.

 

"저 새끼 정신 들었나 본데? 눈 떴어." 굵직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의 누군가 내가 눈을 떠서 주변을 살피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형님, 이짝으로 와 보소. 저 자슥이 정신이 들었는갑네." 누군가를 부르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체격은 보통 사람 정도였지만,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매섭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우리가 2년을 찾았어. 꼬박 2. 아마 기록이지?" 누구한테 묻는지 몰랐지만 뒤쪽에 있던 몇몇이 맞장구를 치며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질 않아서 눈알만 굴리면서 내 앞에 선 남자에 대해 파악해 보려고 부질없는 노력을 했다.

 

"일단 은행하고 인증서 비밀번호나 대봐라." 나는 놀란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은 입으로만 씩 웃으며 뭘 그래 놀래냐고 웃었다. "성님이 좋은 말로 할 때 말해라." 옆에 있던 놈이 인상을 쓰며 한마디 덧붙였다. , 사실 딱히 숨길 것도 없었다. 내 은행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은 거의 없었으니까. 나는 은행 이름과 인증서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그러자 잠시 후 뒤쪽에서 접속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몰랐는데 정신을 잃은 사이에 내 호주머니에 있던 인증서가 들어 있는 USB까지 다 꺼내간 모양이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는 몸을 돌려 소리가 난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인터넷 뱅킹을 통해 내 은행계좌를 함께 들여다보는 모양이었다. "뭐야, 이거 거지 새끼구만. 그래도 매달 들어 오는 돈은 꽤나 많네. 그런데 그게 다 어디로 빠져나가는 거야?" 남자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긴 어디로 가. 다 또 다른 빚쟁이들한테 가지.'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비밀번호를 말해 줄 때까지는 딱히 별 생각 없는데 누군가 내 계좌를 대놓고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에서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것은 일종의 창피함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치심에 가까웠다. 빚이나 받으러 다니는 깡패 새끼들에게 수치심을 느끼다니... 분명히 내 감정이지만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보니 일반 직장인들처럼 한 달에 한번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서 수입이 적고 여러 번으로 나뉘어서 들어왔다. 특히 인터넷 댓글 알바는 거의 매일 정산이 이뤄져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 입금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더군다나 빚 자체도 여러 군데로 나뉘어 있다가 보니 매달 출금되어 나가는 횟수도 많았다. 그래서 내 계좌 입출금 내역을 보면 일을 해서 입금된 돈들과 갚아야 할 빚이 자동이체가 되면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도 바쁜 사람들이니까 짧게 말할게. 일단 여기 지장 찍고, 6개월 준다. 그때까지 선금으로 1억을 갚고, 나머지는 매달 정산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다시 내 앞으로 다가온 놈은 말을 하다가 멈춘 후 눈앞에 종이 한 장을 디밀었다. 너무 가까이 디밀어서 내 눈에 보인 단어는 신체포기각서뿐이었다. 섬뜩했다. 내가 종이에 적힌 다른 내용들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도중 어디선가 두 명이 다가오더니 내 오른 손을 강제로 쥐고 엄지에 인주를 바르고는 종이에 지장을 찍었다.

 

"원금이 2천이여. 그리고 지난 3년간 이자가 245, 그리고 우리가 너 찾는데 쓴 비용이 34, 그래서 총 얼마냐?"

 

"299백이지라요. 성님. 근데 그게 다가 아니지라요. 앞으로 6개월 동안 붙을 이자 치면 최소 35천은 받아야 한당께요."

 

내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오갔다. 2천이 원금인데 3년 만에 3억이 넘게 바뀌었다. 그리고 나보고 6개월 내로 1억을 갚으라고 한다. 그 후로도 내가 버는 모든 돈을 매달 자신들에게 넘겨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강제로 지장을 찍은 신체포기 각서대로 내 몸의 장기들을 분리해서 팔겠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이 놈들의 말이 단순한 협박은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상황파악이 좀 되자 코끝을 맴도는 비린내의 출처가 바로 바닥에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검붉은 자국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핏자국이 분명했다. 나처럼 빚을 갚지 못한 누군가가 흘린 피다. 맞아서 흘린 피일 수도 있고, 섬뜩하시지만 장기가 적출되면서 생겨난 핏자국일 수도 있었다. 사는 것에 별 미련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 6개월 내로 어떻게 1억을 마련할 수 있을까? 지난번에 은행에 가서 알아 본 대출을 받게 되면 3천만 원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아무 것도 안하고 모으면 2천만 원 정도 모을 수 있다. 그래 봐야 5천이다. 그러면 나머지 5천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결국 또 다른 빚을 지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내가 빚을 낼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은 없다. 결국 또 이런 놈들에게 돈을 빌리는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빚을 내더라도 그 빚을 갚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2천의 돈으로 3년만에 3억의 빚이 되었는데, 5천의 돈을 두면 도대체 얼마의 빚으로 불어날까?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미래였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 6개월 내로 1억은 너무 무리인 것 같은데..."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끝을 흐리면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1억을 5천으로 줄일 수만 있다면 숨구멍이 트일 것이다.

 

"그건 네 사정이고. 그럼 어디 손가락이라도 하나 잘라줘야 무리가 아니게 될까?" 어느 새 한 손에 칼을 꺼내 든 놈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 잔인한 표정을 보니 입이 얼어붙어서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네 전화기에 위치추적 프로그램 깔아 놨으니까 지우지 마. 만약에 지우면... 네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던 여동생 연락처 있지? 보니까 조카도 있는 것 같던데, 내가 더 이상 말 안 해도 알겠지?"

 

순간 지금까지 느낀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 한 몸은 그렇다고 쳐도 동생과 조카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두려움은 금세 분노로 바뀌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동생을 건들면 네 놈들도 죽여 버릴 것이라고 온갖 욕을 퍼 부었다. 내가 그렇게 발악을 하자 곧 바로 주먹이 날아왔다. 하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나는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결국 정신을 잃었다.

 

* * *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런 기분이라면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 분명할 것이라고 판단을 했다. 몸에 감각이 없으니 내가 땀을 흘리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몹시 두렵고 불쾌한 꿈이었다. 기껏해야 몇 억도 안 되는 돈 때문에 내가 빚쟁이들에게 사로잡혀서 신체포기각서를 써야 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있지도 않는 여동생과 조카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받고, 그로 인해 발악을 하다가 두들겨 맞고는 정신을 잃은 꿈이었다. 비록 꿈일 뿐이지만 깨기 직전 두들겨 맞은 부위가 정말로 아픈 듯 느껴졌다.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내가 꿈을 꾼 것만으로도 감각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날만한 일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 꿈속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서서히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평소와 비슷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그때가 되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병실이 느껴졌다. 간병인도 잠을 자러 간 모양이었다. 지금 도대체 몇 시나 되었을까? 눈이 제 역할을 못하니 햇살조차 감각할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 말하지 않으면 도대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한 조각의 햇살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다시 한 번 꿈속의 상황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예전이 꾸었던 꿈의 내용과 오늘 꾼 꿈이 합쳐지면서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비록 꿈이지만 너무도 생생했고,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흐름이 있었다. 단지 내가 궁금한 것은, 보통 꿈은 자신의 두려움이 나온다는데, 단 한 번도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 왜 그런 꿈을 꾸게 되는지에 대해서였다. 꿈은 반대라서 그런 것일까? 누가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잇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돈이 부족하다거나 없다는 것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살아오면서 시간이 안 되거나, 여건이 안 되거나, 조건이 잘 안 맞아서 못한 적은 있지만 단 한 번도 돈이 없어서 무엇인가를 못한 적은 없었다. 지금도 비록 식물인간이 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도 당연히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치료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할 수 있는 치료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 뻔했다. 적어도 선영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녀는 아직 나를 대체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지 못한 탓에 내 치료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자꾸 그런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꿈을 꾸게 되는 것일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꿈속에서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하필이면 현실 속 내 처지와는 너무도 다른, 그런 비루하고 비참한 삶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보면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는 돈이 없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데 꿈속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참 이상한 일이다. 머리가 나빠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머리가 나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래 스스로 경험하지 않는 것을 판단할 수는 있어도 제대로 공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을 본 적이 없는 맹인은 무지개가 어떤 것인지 설명은 할 수 있어도 상상할 수는 없다. 사실 나도 이런 몸이 되기 전까지 식물인간이란 것을 그저 단어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 식물인간이 되고 나자 비로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러니하게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가장 별 것 아닌 문제였다.

 

나는 스스로 대소변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굴욕감을 감당해야 했다. 나는 언제쯤 이 상태에서 풀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평생 이런 상태로 살다가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절망감을 견뎌내야 했다. 나는 내 돈을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시간의 늪에 빠져 점점 잡혀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내 목숨마저 스스로 마무리할 수 없었다.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유일한 특권일 수 있는 자살마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참함을 넘어선 어떤 것이었다. 비참함도 인간과 비슷한 삶을 살 때나 느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내가 꾼 꿈속의 상황과 실제 상황은 극과 극인데도 어떤 면에서는 매우 닮아 있었다. 결국 둘 모두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꿈속에서는 돈이 없어서, 현실에서는 몸이 없어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자꾸 그런 꿈을 꾸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점점 더 우울해졌다. 나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또 다시 잠에 깬 것은 익숙하고도 듣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빠지는 목소리의 주인공 때문이었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작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존재의 목소리였다.

 

예의 상 작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존재는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부모님의 재산을 노리던 인간이었다. 물론 고모들 두 명과 이모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게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 하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의 몇 년 간의 싸움을 통해서 겨우 내가 정당하게 가져야 할 유산을 다 챙길 수 있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의 그런 태도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잘못도 컸다. 세금을 줄일 목적으로 당신들의 형제자매들에게 차명으로 재산을 분리시켜 놓은 탓에,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그들이 자신들의 명의로 되어 있는 부동산을 그대로 먹으려고 한 것이기에 그렇다.

 

분명히 차명계약에 대한 서약서가 별로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차명 그 자체가 불법적인 것이란 점을 들어서 자신들이 소유한 부동산을 그대로 꿀꺽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국내 최고의 변호사 집단에게 맡겨 결국 모든 것을 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그들과의 모든 인연이 끝이 났다. 하지만 내가 이런 처지가 되자 친척들은 슬금슬금 또 다시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재산을 물려 줄 아이도 없는 처지가 분명하니, 만약 내가 죽게 되면 내 재산의 일부를 유산이란 명목으로 받을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계산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별 다른 차도가 없군요." 작은 아버지란 인간은 나를 걱정해주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나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는 그렇다고 답을 했다. 아쉬움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지만, 그 아쉬움은 아마도 내가 병을 털고 일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나빠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가 분명했다. 기분은 나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단지 내가 귀를 막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잠시 동안 저 인간의 하는 헛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점이 좀 불편했다. 그럼에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나저나 저런 상태로 너무 오래되면 결국 존엄사라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나를 위해서 정말로 사려 깊은 말이 나오고 있었다. 나 역시도 요즘 존엄사, 아니 존엄 따위가 아니고 그냥 안락사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꼼짝도 못하는 몸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시간의 군대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전의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지내다가는 상대적으로나마 멀쩡하던 정신도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내가 스스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것의 신호였다. 나는 마비된 몸에 우울증까지 겹쳐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건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고, 그리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는 불법입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그러자 작은 아버지는 한참을 존엄사의 중요함에 대해서 그리고 유럽 몇몇 나라에서 실행하고 있는 존엄사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했다. 듣다 보니 나도 긍정적으로 설득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존엄사 법이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 국회의원 욕을 한참 하더니 요즘 정부가 부동산에 세금을 너무 많이 매긴다고 뜬금없는 비판도 해댔다. 내가 알기로는 본인이 가진 부동산도 별로 없으면서 그랬다. 벌써 내 재산을 유산으로 받은 후를 걱정하는 것일까?

 

"작은 아버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영이였다. 그녀도 옆에 있었나 보다. 나중에 집안 어른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인지라 말투 자체는 조심스러웠지만 목소리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이런 처지가 된 후로부터 법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 재산이 이미 자신의 것인 듯 맹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아무리 그런 식으로 행동해도 법의 입장에서만 보면 그녀와 내가 연결된 고리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실혼 관계도 아니었고, 사고가 나기 전 만난 지 겨우 1년 남짓했을 뿐이다. 그러니 법정에 섰을 때 판사는 당연히 나와 그녀와의 관계를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선영이 입장에서는 내가 아주 잠깐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명백해 말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또한 그와는 별도로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최대한 병실을 자주 찾아서 오래 머묾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도 열심히 했다. 그런 노력을 통해 병원 내 간호사와 의사 그리고 간병인이 증언이 더해지면 어쩌면 사실혼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관계를 인정받아서 내가 죽은 후 유산에 대한 일부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은 내 스스로 한 억측은 아니다. 나 역시도 선영이가 혼잣말로 한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녀는 병실에 혼자 있을 때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곤 했는데, 그 중 일부였다. 내가 선영이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도 믿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선영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그녀는 현재 내 재산을 노리며 끝없이 주변을 맴도는 하이에나들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긴 했다. 물론 그녀도 결국엔 내 재산을 노리고 있지만, 그것이 나의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의 회복을 통해서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작은 아버지나 다른 친척들은 내가 죽어야만 비로소 유산을 받게 되지만 선영은 내가 어떻게든 내가 살아나야만 한 푼이라도 건질 수 있는 입장이다.

 

내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는 그렇게 매일같이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자들과 꼭 살아나기를 바라는 자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끝없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제한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죽거나 혹은 그 전에 선영이가 다른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라도 하면 그 시점에 끝나게 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신경전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한번 시작되면 한 시간은 훌쩍 넘기는 말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아마도 오늘도 그럴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는데, 마치 친구들을 놀래 키려고 숨었는데, 그 친구 둘이 내 험담을 해서 놀래 키지도 못하고 그들이 떠날 때까지 계속 숨어있어야 할 때 느낄 수 있는 기분이었다. 민망스럽기도 하면서도 화도 났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둘 사이의 충돌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그들의 말다툼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한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스스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참했다. 나는 지루하다 못해 절망감까지도 느끼지는 이 병실의 고립으로 인해 내 돈을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의 충돌 현장마저 아쉬워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은 나를 더욱 더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너무도 오래 고립되어서 나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마저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독하고 공허한 지루함이 매일 나를 목 조르고 있었다.

 

어쩌면 내 꿈속에서 등장하는, 끝없이 빚쟁이에 쫓기고 매일 일만 하고 살아야 하는,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그런 비루한 삶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삶처럼 돈이 없다면 지금 내 옆에는 내 돈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나를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가 내 옆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 * *

 

또 그 꿈이다. 정신이 들자마자 몹시 기분이 나빴다. 비록 잠에서 깼지만 꿈속에서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왜 자꾸 그 꿈을 꾸게 되는 것일까? 지금 돈이 너무도 필요해서 그런 것일까?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은 겨우 2개월, 그 안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나는 아마도 죽을 것이다. 내 안구가 적출되고, 신장과 간이 누군가에게 이식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뿐인 심장이 어둠의 경로를 통해 고액을 돈을 받고 팔릴 것이다. 그렇게 비싼 장기들이 다 적출되고 난 내 몸은 어딘가 산 속에 파묻히거나 영화 속 장면처럼 드럼통에 넣어진 후 콘크리트가 부어져 어딘가 먼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다. 죽은 후에도 내 몸은 어딘가 편히 쉴 장소를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지난 4개월 동안 나는 정말로 미친 듯이 돈을 구해보려고 애썼다. 졸업 후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던 초등학교 친구에게조차 연락을 했었다. 심지어 예전에 잠깐 만났던 여자 친구에게도 연락을 했다. 서로 좋아했지만 내가 너무 돈이 없어서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여자였다. 염치 불구하고 돈을 좀 꿔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누구도 돈을 빌려주지는 않았다.

 

강도짓이라도 해야 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잘 할 자신이 없었다. 칼을 들고 들어갔다가 칼을 뺏겨서 오히려 나만 다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감옥에 가야 한다. 사실 감옥에 가는 것도 일종의 해결책이긴 했다. 감옥 안에 있는 동안만큼은 그 놈들도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거기에 있을 수는 없다. 살기 위해서 평생 감옥에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내 꿈속에 나오는 식물인간이 된 채 살아가는 그런 삶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삶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으로 나오면 안 되는 나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주 오랜 시간 그곳에 있다가 나오는 것은 어떨까? 지금부터 한 30년쯤 후에 감옥에서 나온다면 어차피 나를 쫓던 깡패 놈들도 늙어서 그 짓을 그만 뒀을 것이다. 나름대로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예전에 봤던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에서 50년을 감옥에 있다 나온 한 남자가 너무도 많이 바뀌고, 더해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교도소 밖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이 나왔었다. 내가 교도소에서 30년 정도 있다가 나오면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딘가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도,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가 다시 적응해야 하는 것도 모두 두려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기가 적출된 채 죽는 것보다는 덜 두려웠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감옥은 나의 마지막 선택지가 될 것이다.

 

해외로 도망칠 수도 있다. 동남아 쪽으로 도망가면 놈들도 나를 쫓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비록 빚은 많아도 범죄자는 아니다. 그러니 여권을 발급 받고 빚을 갚기 위해 지금껏 모은 돈을 가지고 동남아로 가면 된다. 그것은 감옥에 가거나 죽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그 모든 선택지를 다 포기하게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만약 그런 식으로 그 놈들의 접근을 막게 되면 내 여동생에게 그리고 조카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한, 놈들은 절대로 내게 받아야 할 빚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더라도 여동생 집에 찾아가 행패를 부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마지막 희망이 있긴 했다. 여동생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삶을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 처지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서 내가 필요한 돈 5천만 원을 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돈을 구해서 나를 돕겠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차마 내가 신체포기각서를 쓴 일이나, 내가 도망치면 너와 조카애에게 해코지를 할 것이란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갑자기 꿈속의 내가 떠올랐다. 꿈속의 내가 부러웠다. 비록 몸은 마비되었더라도 언젠가 깨어날 희망이 있다. 그리고 평생 돈 걱정은 안하고 살아도 된다. 물론 누군가에게 똥오줌 처리를 맡겨야 하고, 남아도는 시간이 고문이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리 좋지는 않다. 그럼에도 나처럼 지독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미친 듯이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은 살지 않아도 된다. 하루 종일 그냥 병원에 누워서 지내면 된다. 내가 그렇게 쉬어 본 적이 언제일까? 까마득했다.

 

부러움 속에서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꿈에서 절대로 깨어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랬다.

 

* * *

 

여전히 출구가 보이질 않았다. 하도 자주 꿈을 꿨더니 이제 꿈속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꿈속의 나에게 돈을 보내주고 싶다. 겨우 5천만 원이 없어서 장기를 털릴 상황이었다. 겨우 3억의 돈을 갚지 못해서 깡패 놈들에게 그런 협박을 당하고 있다. 겨우 몇 억의 돈을 갚기 위해서 하루에 다섯 시간을 자면서 일을 하고 있다. 누가 봐도 비참하고 고루한 삶이다. 도대체 왜 죽지 않는지가 의문스러운 삶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그 삶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하루 종일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리는 삶은 아니지 않은가? 삶에서 시간을 지우기만 해야 하는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내가 느끼는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사람은 살다가 보면 시간을 지워야 할 때가 있긴 하다. 그럴 때 사람은 시간을 때운다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은 그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다가 올 미래의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경우, 이렇게 매일같이 시간을 지운 후 마지막으로 받게 되는 결과는 늙어서 죽는 것 하나뿐이다. 평생 시간을 지우다가 죽고 마는 삶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도대체 그것이 인간의 삶이 될 수 있을까?

 

시간이 행복할 때 잊힌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잊힐 때 비로소 우리가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된다. 나처럼 되면 시간이 감각되는 삶은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다. 내 꿈속의 삶처럼 바빠도 시간이 잊혀 지긴 한다. 매일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들은 퇴근이라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렇게 시간을 잊은 채 바쁘게 일할 수 있다. 나는 행복하지도 않고 바쁘지도 않다. 또한 퇴근도 없다.

 

최근 선영이의 방문이 뜸해졌다. 아무래도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멀쩡한 호구라도 하나 물은 모양이다. 사실 그런 반반한 얼굴이면 눈만 조금 낮춰도 얼마든지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 만약 이대로 선영마저 나를 떠나게 되면 TV를 켜 줄 사람도, 별로 듣고 싶지는 않지만 내 옆에서 주절주절 떠들어 줄 사람도 없어지고 마는데, 나는 도대체 어떻게 내 시간들을 감당해야 할까?

 

무력감 속에서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그 꿈에서 절대로 깨어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랬다.

 

[끝]

 

'소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 변두리 삶 #1  (0) 2021.03.20
[단편] 완벽한 인생 #2  (0) 2021.03.10
[단편] 완벽한 인생 #1  (0) 2021.03.10
김두삼씨 이야기 - 끝  (0) 2020.02.20
김두삼씨 이야기 - 16  (0) 2020.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