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들

[가르침] 지식과 경험

아이루다 2020. 10. 25. 07:40


스승: 어떤 책을 읽고 있기에 그리 얼굴이 좋아 보이느냐?

 

제자: 얼마 전 서점에서 오랜만에 좋은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스승: 그렇지. 원래 좋은 책을 만나게 되면 그렇게 웃음이 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무엇에 관한 책이더냐?

 

제자: 그저 사람의 심리에 관한 책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승: 듣고 보니 재미있겠구나.

 

제자: 네, 그렇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다 보니 저 자신에게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느낌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 왜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쉽게 살지 못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스승: 그것은 좋은 일이지. 자신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야.

 

제자: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스승: 그런데, 너는 왜 너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느냐?

 

제자: 음.. 그건 아마도 저의 어리석은 과거를 이해해 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제가 어느 정도 용서가 됩니다.

 

스승: 그렇구나. 그런 경험은 참 좋은 것이지.

 

제자: 제가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읽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이제서야 이 책을 알게 되었는지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스승: 아마도 그럴 때가 된 것이겠지.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드는구나.

 

제자: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스승: 과거에 네가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처럼 재미있게 읽지 못했을 것 같구나. 그래서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자: 네? 무슨 말씀인지.. 지금 이렇게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과거의 저는 왜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인지요?

 

스승: 그것은 경험의 문제로 인해 그렇다.

 

제자: 아.. 과거의 저는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란 말씀이신가요?

 

스승: 그렇다. 네가 지금 책을 읽고 있을 때는 지식을 얻는 과정이고, 네가 살아온 삶은 경험을 쌓는 과정이다. 이 둘은 마치 별도의 것처럼 느껴지고 또한 각자 중요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매우 종속적이다. 그래서 같은 지식도 경험의 깊이에 따라서 다르게 얻어지고, 같은 경험도 지식의 깊이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게 된다.

 

제자: 음.. 저는 지금껏 그것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스승: 별 상관은 없다. 단지 경험이 빠진 지식은 너에게 편견을 만들어서 너의 본질을 잃게 만들고, 지식이 빠진 경험은 너를 눈을 가린 소처럼 만들어서 어디인지도 모르고 돌진하게 만들고 만다는 점은 알고 있어야 한다.

 

제자: 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스승님 말씀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습니다.

 

스승: 너는 지식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제자: 지식이라면,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제대로 된 지식이라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지식은 한계점이 명확하지.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제자: 지식의 한계라면, 우리가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스승: 물론 그것도 지식의 문제점이긴 하지. 하지만 나는 지금 다른 문제를 말하고 있다.

 

제자: 그렇다면 지식이 가진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까?

 

스승: 있다. 그것도 훨씬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제자: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 지식의 문제점은 단순하면서도 치명적이다. 하지만 사실 지식 그 자체의 문제라고 보다는,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이다.

 

제자: 수단이라면..

 

스승: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제자: 지식이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문제라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저는 그것은 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스승: 지식이 다루는 대상은 이 세상의 것들이다. 그리고 세상의 것들은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지식을 전달하는데 쓰이는 언어는 그 한계로 인해서 한 순간에 한 가지 단면만을 서술할 수 있을 뿐이지.

 

제자: 흠.. 이해가 갈 듯 하면서도 혼란스럽습니다.

 

스승: 쉽게 말해서 언어는 우리의 눈과 비슷하다. 우리가 입체적인 사물을 볼 때 늘 평면으로 보게 된다. 언어를 통해 지식을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설명을 할 때는 한 단면만을 보고 되지. 그럼에도 사실 그 자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가 더해지면서 치명적인 문제가 되고 만다.

 

제자: 어떤 것이 더해지는지요?

 

스승: 그것은 바로 전달자의 의도이다. 그러니까 같은 지식도 전달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설명될 수 있다. 사과를 팔고 싶은 사람은 사과가 몸에 좋은 점을 지식으로 전달하려고 할 것이고, 사과대신 귤을 팔고 싶은 사람은 사과가 몸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그 둘은 모두 지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그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사용되고 만다.

 

제자: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렇다면 전달자가 그 문제를 알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한다면 그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스승: 안 된다. 일단 원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객관적으로 될 수 없으며, 설령 된다고 해도 언어가 가진 문제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단편적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다양한 관점에서 지식을 전달하고자 해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

 

제자: 그럼 지식을 제대로 전달할 그 어떤 방법도 없는 것인지요?

 

스승: 일단은 그렇다. 하지만 경험이 더해지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경험은 지식과는 달리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식은 경험이 더해질 때 온전해질 수 있다.

 

제자: 아.. 듣고 보니 당연한 말씀입니다.

 

스승: 그 뿐만이 아니라 경험이 더해지지 않는 지식은 또 다른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제자: 뭔가 또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스승: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이다. 지식은 아무리 많이 얻어도 그것에 대한 경험이 기반되지 않으면 그저 아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경험되지 않은 지식은 결코 이해될 수 없다. 그저 아는 것뿐이다.

 

제자: 경험하지 못하면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요?

 

 

스승: 네 말이 맞다. 우리는 맹인에게 무지개의 느낌을 설명할 수 없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새소리의 아름다움을 이해시킬 수 없다. 바다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바다를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해봐야 그들은 지식적으로만 그것을 알게 된다.

 

제자: 듣고 보니 경험이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승: 꼭 그렇지 만도 않다. 오히려 경험은 지식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제자: 경험이 위험하다고요?

 

스승: 그렇다. 아까도 말했듯이 지식이 없는 경험은 눈을 가린 소처럼 우리를 아무 곳이나 달려가게 만든다. 그리고 운이 나쁘면 그 끝이 절벽일 수도 있다.

 

제자: 어떨 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요?

 

스승: 경험을 맹신하면 그렇게 된다. 내가 봤다, 내가 들었다, 내가 느꼈다, 등등 자신이 오감으로 경험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맹신하면 그런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제자: 하지만 그런 감각적 경험을 믿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스승: 감각적 경험은 믿을만하지.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경험을 얻어야 대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느냐? 

 

제자: 계속 경험하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스승: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은 사실 겉보기 지식에 불과하다. 하늘에 뜬 무지개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한참 경험이 쌓이면 비가 오고 난 후 무지개가 뜬다는 경험적 지식만 생기게 된다. 바다를 계속 바라보다 보면 수평선을 보게 되고, 그 수평선만 보다가 보면 이 세상의 끝이 절벽처럼 존재할 것이란 상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 지구가 둥글다는 지식을 설명하면 비웃으면서 미친놈 취급을 할 것이다.

 

제자: 아.. 경험적으로만 이해하면 그런 오해들이 생길 수 있겠네요.

 

스승: 그렇다. 우리는 지식을 통해 경험적 이해를 뛰어 넘을 수 있다. 경험적으로 이해한 것들은 지식의 습득을 통해서 온전해진다. 그렇게 지식과 경험은 서로를 온전하게 해준다.

 

제자: 이제야 스승님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지식과 경험은 모두 중요한 것이고, 서로에게 종속적일 수 밖에 없겠네요. 그리고 그 둘이 만날 때 제대로 된 이해가 이뤄지겠군요.

 

스승: 하지만 거기에도 결국 한계는 존재한다.

 

제자: 어떤 한계가 있는지요?

 

스승: 그것은 각각 지식을 받아들이는 지적 능력의 한계와 경험을 담당하는 감각기관의 한계이다. 결국 인간 본질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그 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알고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식과 경험에 대한 맹신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지식에 경험이 더해지면 확신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확신은 편견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설령 특정 상황에서는 완벽히 맞을 수 있지만, 또 다른 상황에 놓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상대적으로만 옳을 수 있다. 오직 진리만이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옳다. 아니,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단 하나 뿐이며,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제자: 아.. 그렇군요. 결국 진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군요.

 

스승: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지식과 경험이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진리를 제대로 마주하려면 그때는 지식과 경험을 초월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그럴 듯 하지만 결국 고정된 틀이다. 그 틀을 깨고 나갈 때 유일하게 진리와 대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 인간이 세상의 것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지식과 경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자: 흠.. 저는 아직 스승님 말씀이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스승: 괜찮다. 아직은 너에게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너는 아직 덜 익은 상태인 과일이다. 너는 네 자신이 어서 성장해서 달콤하고 풍성한 과즙을 지닌 과일이 되길 꿈꾸고 있겠지만, 충분히 익어서 땅에 떨어지는 순간 불현듯 알게 된다. 너는 그저 네 안에 품은 씨앗을 키워내기 위해서 존재했던 것임을 말이다. 처음부터 과일의 목적은 달콤한 과즙이 아니었다. 과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다들 먹지도 않고 버리는 씨앗이다.

 

제자: 그렇군요. 저도 언젠가는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날이 올 것임을 믿고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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