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들

[가르침] 에고적 경험과 비에고적 경험

아이루다 2019. 6. 7. 08:28

 

제자: 스승님. 저는 오늘도 에고와의 전쟁을 하는 중입니다. 스승님께서 지난 번에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말씀해주셨지만, 저는 어쩔 수 없이 매일 에고를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은 제가 많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스승: 원래 에고의 허상은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진 후 알 수 있는 것이다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후에 비로소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허공에 공기가 존재했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그러니 지금 이 순간 에고의 존재성에 대해서 너무 깊이 고민을 하지는 말거라.

 

제자: ,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에고에 관해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스승: 얼마든지 질문하거라.

 

제자: 지난번 스승님은 저에게 에고가 살고 싶다는 욕망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늘 살고 싶음을 느낍니다그렇다면 제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오직 에고를 통해서만 가능합니까?

 

스승: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답을 먼저 해주자면, 그것은  '아니다' 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에고를 통해서만 경험되지는 않는다. 비에고적인 경험도 얼마든지 많으며, 그것만을 통해서도 세상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제자: 그렇다면 저도 그런 비에고적인 경험을 할 수 있습니까?

 

스승: 당연히 가능하다. 사실 너는 매일 그것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네가 못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너는 지금 에고적인 것과 비에고적인 것을 구분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네가 매일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게 되는 수 많은 생각과 행동이 과연 에고적인 것인지 아니면 비에고적인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너의 문제만이 아니다. 원래 그 둘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기에 그렇다. 에고는 오직 그것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워질 때 제대로 보인다.

 

제자: 그렇다면 스승님은 그것을 완벽히 구분하실 수 있잖습니까우둔한 제자를 위해서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스승: 그래, 한번 해보자. 네가 지금 힘들게 아주 높은 산에 올랐다참으로 맑은 날이었고 그래서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너의 눈 앞에 짙은 녹빛으로 가득한 산은 굽이굽이 파도를 치듯 펼쳐져 있었고 그와 맞닿은 하늘은 푸른 쪽빛으로 채워진 채 가끔 하얀 뭉게구름만이 그 공간이 하늘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르느라 힘들었던 근육들은 드디어 쉴 수 있는 시간을 찾았기에 뻐근하면서도 시원했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은 땀으로 젖은 몸을 식혀주고 있었다. 그래서 너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몸도 마음도 한없이 좋다. 이때 너의 에고는 어디에 있겠느냐?

 

제자: ..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 자체가 에고가 아닌지요.

 

스승: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비에고적인 경험이다그것은 매우 좋은 감정이긴 하지만 허무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네가 산을 내려옴과 동시에 사라지기에 그렇다그런데 비에고적인 것들의 특징이 바로 그것이다반드시 즉시성을 가지고 있다그러니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뀜에 따라서 사라짐은 당연하다. 하지만 산을 내려와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제자: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 바로 네가 그런 곳에 갔었다는 기억이다. 혹은 네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면 그 사진들이 남아 있다. 그런데 너는 평소에 너의 기억을 통해 네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제자: .. 가끔 그런 기억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스승: 맞다. 그런데 단순히 떠올리지만 않는다. 너는 반드시 그 기억을 판단하게 되어 있다. 너는 네가 얼마나 힘들게 높은 산을 올랐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러면 자신의 의지력과 생명력에 대한 만족감이 든다산 정상에 올랐던 당시 얼마나 격한 감동적 감정을 경험했는지도 기억한다. 그러면 너의 삶이 매우 충만하다는 느낌이 든다그날 얼마나 하늘이 맑았는지 생각해본다. 그러면 너의 삶이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얼마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는지 떠올린다. 그러면 너는 너 자신이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다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너는 언젠가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산에 올랐던 이야기를 하려고 하게 될 것이다. 혹은 요즘 시대라면 찍은 사진을 어딘가에 온라인 공간에 올려서 사람들에게 너와 같은 경험을 해보라고 권유할 수도 있다.

 

제자: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스승: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에고적 경험이다.

 

제자저의 기억이 바로 에고라는 말씀이십니까?

 

스승: 그것은 아니다. 너의 기억 자체가 결코 에고가 아니다. 하지만 네가 경험했던 기억들에 대해서 '판단'을 하려는 순간 에고가 된다. 비에고적들은 즉시성이라는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 지나면 금세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에고적인 것들은 계속 반복되면서 판단된다.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도샤워를 하다가도, 화장실에 가서 똥을 싸다가도 떠오른다네가 남들보다 조금 더 잘난 것 같고, 네가 남들보다 조금 나은 것 같고, 네가 남들보다 조금 더 운이 좋은 것 같고, 네가 남들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들 말이다그것들의 본질은 모두 동일하게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이며, 바로 에고의 고유한 특징이다. 에고는 기억의 비교를 통해서 끝없이 자신이 삶이 온전한지, 안전한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미래에 닥칠 위험은 없는지, 과거에 실수한 것은 없는지를 판단하려 든다. 두려워서 그렇다. 오래 살고 싶어서 그렇다.

 

제자: 그렇다면 제가 행한 무엇인가에 대해서 남들과 비교하는 판단을 할 때 에고적 경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군요.

 

스승: 그렇다. 에고는 결코 홀로 생겨날 수는 없다.

 

제자: 그렇다면 혼자 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감정들은 모두 비에고적 경험인지요?

 

스승: 그것은 아니다. 너는 먼저 홀로 있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네가 높은 산에 올라 벅찬 감동에 휩싸여 있을 때, 재미난 책을 일고 있을 때,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영화관에서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비로소 홀로 있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그 순간 즉시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다. 하지만 네가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거나 미래에 다가올 좋은 일들을 상상할 때도 감정들은 생겨난다. 그것들은 홀로 있든 누군가와 함께 있든 아무런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든지 만들어 진다. 그것들은 모두 판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감정들이며 바로 에고가 그런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제자: 저는 제가 좋은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과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 나름대로 순수한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조차도 에고적 경험이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스승: 맞다. 네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은 자체는 비에고적 경험이다. 책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든, 그 볼품 없는 내용에 화가 나든, 책 속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네가 그 책을 읽고 받은 어떤 느낌을 다른 이들에게 공감 받기 위해서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하거나, 책 내용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거나,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야기 할 때는 즉시 에고적 경험을 하게 된다.




 

제자: 그렇군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되는 순간 에고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겠군요.

 

스승: 그렇다. 네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에고적 경험을 하게 된다네가 의도하지 않아도 너는 그런 대화들 속에서 네가 잘하는 것이 무엇이고, 네가 뛰어난 것이 무엇이며, 네가 오늘 어떤 표현을 멋지게 했는지 경험한다. 반대로 너는 너 자신이 무엇을 못하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불만족스럽게 여기는지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너의 우월감과 열등감의 재료가 된다네가 모임을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많이 얻었다면 기분이 몹시 좋을 것이고 그 시간이 매우 충만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다수와 척이 지는 토론을 했다든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더 잘난 사람들로 인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면 모임이 끝난 후 뭔가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에고적 경험들은 주인공이 될수록 행복해지고 변방으로 밀릴수록 불행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비교가 가진 고유한 특징이다. 하지만 비교에서 승자가 된다고 해도 단순히 그때뿐이다. 그 누구도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제자: 어렵군요. 저는 그런 순간에 제가 정말로 순수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승: 원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감각이 되고행동하여 만족하고, 만족감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먹을 것을 보면 먹고, 잘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그것은 온전히 홀로 경험하는 것이며 남는 것도 없다. 하지만 먹을 것을 사진을 찍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자신이 먹는 것을 남이 먹는 것과 비교를 하는 것을 통해서 남게 된다. 그리고 에고가 된다.

 

제자: 그렇다면 남을 돕는 것은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 그것도 에고적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까?

 

스승: 그것은 아니다. 남을 돕는 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통해서 타인을 바라보기에 가능한 행위이다. 그래서 남과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홀로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남을 도운 후 그것을 떠올리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든다면 그것은 에고가 된다.

 

제자: 어렵습니다. 제가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힘들듯 합니다.

 

스승: 처음에 말했듯이 에고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구분이 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요령은 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를 두려움으로 인해 하고 있느냐, 지루함으로 인해 하고 있느냐로 판단하는 방법이다.

 

제자: ..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스승: 대부분의 두려운 일들은 해야 할 일이 된다. 회사에 갈 때, 가기 싫은 집안 모임 장소에 참석해야 할 때, 뭔가 새로운 것을 어쩔 수 없이 배워야만 할 때, 설거지 같이 귀찮은 집안 일을 할 때가 그렇다. 사실 귀찮은 일이라는 것 자체가 가벼운 두려움이다. 이런 식으로 두려운 일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하게 되고, 하고 나서도 할 일을 했다는 만족감만 들 뿐 기억조차 잘 남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되지 않는 것들은 완벽히 잊혀지고 만다. 아주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1년 전 오늘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제자: 그렇다면 지루해서 하는 일들은 다릅니까?

 

스승: 그렇다. 다르다. 지루해서 하는 일들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아니다. 사실 지루함 자체가 해야 할 일을 모두 한 후에 생겨나는 감정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지루할 때는 두려움을 느낄 때와는 다른 해결책을 쓴다. 바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선택적이다. 그런데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써야 하는데 그것이 선택적이라면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겠느냐?

 

제자: 가능하다면 뭔가 남을만한 일을 하려고 하겠지요.

 

스승: 맞는 말이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 , 에너지를 썼는데 그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면 그 자체가 불행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의미나 가치를 추구하려고 한다. 사실 지루함이 그런 용도로 만들어 지는 감정이다. 미래를 위해 지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명령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높은 산을 오르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뭔가를 배운다. 꼭 할 필요는 없지만 하게 됨으로써 가치가 만들어 진다. 그런데 이 가치가 바로 완벽한 에고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가치라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다른 것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만들어지니까 그렇다. 책이 있는 것이 가치가 있으려면 책을 읽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치가 없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책만 읽는다면 누가 책을 가치 있다고 하겠느냐? 누군가 책을 읽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에 책이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도 바로 같은 원인이다. 다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가장 좋은 가치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그렇게 다툼이 생겨나고 있다.

 

제자: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모두 비에고적이고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 모두 에고적일 수 밖에 없겠습니다.

 

스승: 대체적으로 그럴 뿐 결코 단언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도 나중에 해냈다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하고 싶다는 것에도 분명히 비에고적인 즐거움이 있기에 그렇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실 가치의 여부이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든 가치화 시키면 에고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그러니 싫어하는 것도 하고나서 해냈다는 가치를 가지면 에고화 되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도 그냥 즐기기만 한다면 온전히 비에고적 영역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무엇을 하고 살든 시간이 쌓이고 돈을 들이고 노력을 했다면 반드시 합당한 가치를 느껴야 하니까 말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가치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제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스승: 무엇을 하고 살든 자신이 그저 먹고 살거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두렵거나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고 있음을 자각하면 된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든, 우주로 나가든, 세상을 놀래 킬만한 발명을 하든,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서 남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든,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집에서 TV를 보는 것과 완벽히 동일하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서 TV를 보면서 자신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고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가치 있는 행위를 하고 있더라고 그저 그것은 자신이 두려움이나 지루함을 해결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같은 목적이라면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을 하는 것이 좋다. 우주 여행에 도전하거나 마약을 하는 것은 완벽히 동일하지만 가능하다면 우주 여행을 준비하는 편이 낫다. 그 이유는 좀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가치가 가진 의미를 잘 따져보면 그 안에 이득, 그러니까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어떤 식으로든 좀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때 가치가 있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가능하면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하는 일을 하고 사는 편이 낫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더 유리해서 그렇다.

 

제자: 이해는 가지만 무척 실천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스승: 맞다. 그래서 에고에서 벗어나기가 그리 힘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가치 있다고 느끼는 순간, 무엇인가는 반드시 가치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네가 열 명의 아이 중 하나에게 칭찬을 하는 행위는 비에고적이고 순수해 보이지만, 그 순간 아홉 명의 아이들은 상처를 입는다. 그러니 그 행위가 결코 비에고적일 수 없다. 칭찬 자체가 가치를 평가하는 행위이기에 그렇다.

 

제자: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스승: 그래서 에고가 줄어들수록 자연스럽게 세상과의 접점이 사라지게 된다할 말도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이 말에 대한 반응도 작아진다. 반대로 말이 많고 반응이 클수록 내면에 에고가 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제자: 그렇다면 에고가 사라지면 말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까?

 

스승원칙적으로는 그렇다. 그래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점점 말이 줄어들게 된다. 좀 더 명확히 설명하자면,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온전히 에고적 행위이다. 사람들을 매일같이 말을 통해서 자신이 잘났음을 증명하려고 하고,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려고 한다말을 통해서 끝없이 지루함을 해결하려고 하고, 말을 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공감을 얻으려고 한다. 말은 일반적으로 불안할수록 많아지고, 내면이 비어있을수록 자주 하게 된다.

 

제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묵언수행과 같은 것들을 하는군요.

 

스승: 그렇다. 하지만 말을 참는 것은 결코 제대로 된 훈련이 아니다. 말을 자연스럽게 줄어들어야 한다. 단지 말을 줄이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과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제자: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승님은 지금 왜 말씀을 하고 계신지요? 그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묻고 싶습니다.

 

스승: 나는 너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답을 하고 있기에 그렇다. 이 둘은 같은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제자: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 둘이 무엇이 다른지요.

 

스승: 서점에 가면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책이 있다. 하나는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책으로 어떤 분야의 지식을 담은 책이지. 이런 책들은 결코 사람을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사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감정을 통해서 읽히지 않는다. 그저 오직 이성적 능력으로만 이해하게 된다. 수학책이나 물리학 책 등이 바로 그런 종류의 책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람을 설득한다. 분명히 이성이나 논리적 도구를 썼더라도 그 내용 자체가 설득이다. 처음부터 저자가 말하고 싶은 주장을 담고 있어서 그렇다. 철학 책과 같은 것들이 그런 책이다그리고 소설, 에세이, 시도 마찬가지다. 그 주장의 강도가 약할 뿐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공감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지은이의 설득이 통하면 감동이 느껴지고 통하지 않으면 돈이 아깝다고 느끼게 된다.

 

제자: .. 이해가 갈 듯 하면서도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스승: 학습지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그리고 돈을 버는 것은 보통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두려움과 관련된 것이고 바로 비에고적인 것이다. 물론 명성을 얻고 싶어서 학습지를 내는 사람들도 있으니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그렇다. 반면에 철학서를 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보다는 명성을 원한다. 물론 그들도 돈을 원하긴 하지만 훨씬 더 큰 것은 자신의 생각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싶은 것이자. 자신을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지루해서 하는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에고적인 일이다. 학습지는 세상에 필요하다. 후대를 위해서 반드시 만들어져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철학서나 소설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물론 없으면 세상이 좀 더 지루해지긴 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것을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에게 하고 있는 말들은 바로 학습지이다.

 

제자: 스승님의 말씀이 다 학습지라고요?

 

스승: 그렇다. 나는 지금 너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기에 나는 너에게 합당한 답변을 내주고 있는 상황이란 뜻이다. 이것이 원래 학습지의 존재 이유이다.

 

제자: .. 그렇다면 스승님은 지금 하고 싶어서 하시는 말이 아니라 제가 질문을 했기 때문에 답을 해주시고 계시는군요.

 

스승: 그렇다. 사실 나는 말을 하는 것이 매우 귀찮다. 이미 말은 나에겐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없다. 더군다나 말은 기본적으로 단어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에 논리적이며 표상적이다. 내가 아무리 너에게 뭔가를 제대로 설명해주려고 해도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그 의미는 뒤틀린다. 더군다나 내 말은 결국 너의 머리 속에서 해석되기에 뒤틀린 수준을 벗어나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말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단지 말을 통해서 대략 어떤 것인지, 어느 방향인지, 어떤 것들이 문제가 될지 정도만 어렴풋이 알려줄 수 있다.

제자: 이제 조금 이해가 갔습니다. 누군가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되는군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하고 있지요.

 

스승: 그렇다. 물어보기도 전에 다들 먼저 말을 한다. 사실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말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설령 참고 말을 하지 않고 있더라도 언제든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누군가 자신에게 물어 볼 사람이 없는지를 살핀다. 어딘가에 사진을 올리면서 누군가의 댓글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잘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댓글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왜 쓸데없이 고생하면서 사진을 올리겠는가? 사람은 본래 이득과 손해에 엄청나게 민감한 존재이다. 같은 백 원짜리라고 해도 더 반짝이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사진을 찍고 편집해서 올리는 노력을 했다면 당연히 그것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 필요하다. 말을 하는 것 역시 시간과 노력을 하는 일이다. 차라도 마시려면 돈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그에 합당한 무엇인가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에고적 행복이다. 그나마 좋은 것들이 위로와 공감이고 나쁜 것들은 비교에 의한 우월감과 열등감이다. 하지만 듣기에만 좋을 뿐, 위로와 공감도 결국 에고적일 뿐이다.

 

제자: 이제 조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모두 없애고 나면 도대체 무엇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지요.

 

스승: 먹을 때 행복하다. 멋진 광경을 볼 때 행복하다. 예쁜 꽃을 볼 때 행복하다. 아름다운 여인을 볼 때 행복하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볼 때 행복하다. 잘 때도 행복하다. 똥을 쌀 때도 행복하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행복한 것이다. 단지 이런 행복들이 어른이 되면서 외로워지고 지루해져서 생겨난 에고적 행복에 가려서 빛을 잃은 것뿐이다. 그래서 그런 에고를 걷어내고 나면 수많은 즉시적 행복들이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어렸을 때 느꼈던 수 많은 행복들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뛰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그저 먹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지금도 어른들은 금세라도 아이들의 운동회에 가서 먹고 뛰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진다. 그것들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에고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이다. 에고의 어리석은 두려움 때문에 있는지 조차 잊어먹어 버린 것이다.

 

제자: 그렇군요. 오늘 말씀 정말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제가 어떻게 에고적 행동을 판단할지 조금이라도 가늠이 됩니다. 오늘 저를 위해서 이 많은 말씀을 해주신 수고는 평소와 달리 더욱 더 감사 드립니다.

 

스승: 언젠가 이른 아침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고 참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눈물이 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이슬이 햇살로 인해 사라지는 순간 그 순간을 모두 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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