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들

[가르침] 스승과 제자

아이루다 2019. 5. 23. 07:01

 

제자: 에고는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스승님.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전 여전히 에고로부터 단 한발국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승: 에고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 왜 그렇습니까? 스승님은 이미 에고를 없앤 분이 아니십니까?

 

스승: 에고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일단 그것이 무엇이든 없애려면 먼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제자: 에고가 왜 존재하지 않습니까? 저는 저의 안에 있는 에고의 존재를 매일 매 순간 느낍니다. 저는 매일같이 잘나고 싶어하고, 이기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조금만 상처를 입어도 좌절하고,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고, 완벽해지고 싶으며, 조금이라도 두려우면 버럭 화를 내니까 말입니다.

 

스승: 맞다. 그것들은 모두 한 가지 동일한 원인의 증상이다. 하지만 그 원인이 결코 에고는 아니다.

 

제자: 그럼 무엇입니까?

 

스승: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에고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이고, 그 환상이 두려움의 존재를 어지럽혀서 마치 다양한 어떤 현상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에고의 환상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그저 두려움 밖에 없다.

 

제자: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에고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수련 과정은 쓸데 없는 짓입니까?

 

스승: 그것은 아니다. 네가 수련을 하는 이유는 에고를 없애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른 명확한 이유가 있다.

 

제자: 그것이 무엇인지요.

 

스승: 바로 네가 가진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고를 버린다는 말이 가진 진짜 의미이다.

 

제자: 어떻게 제 안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스승: 두려움이 왜 생겨난다고 생각하느냐?

 

제자: 제자 아둔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두려움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스승: 맞다. 두려움은 그냥 생겨난다. 그렇기에 또한 그냥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생겨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머리 속에 머물게 된다. 그 이유를 아느냐?

 

제자: 모르겠습니다.

 

스승: 그것은 바로 그 두려움이 왜 생겨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 천둥이 치는지 모를 때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밤새 천둥이라도 친 날이면 다음 날 모여서 간밤에 느꼈던 두려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곤 하지. 어떤 사람들은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하늘에서 하느님이 노한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개구진 사람들은 그것은 신이 방구를 끼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시대엔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전압차이로 인해서 생겨나는 방전현상이다. 전기의 고유한 특징이지. 그래서 이제는 밤새 천둥이 치면 무섭기는 해도 다음 날 아침에 그저 '간밤에 천둥이 심해서 잠을 설쳤네', 라고 하는 정도만 말하고 끝낸다. 지금 방금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느냐?

 

제자: 천둥에 관한 두려움은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 단순하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거나 착각하고 있을 경우 한번 생겨난 두려움은 머리 속에 남게 된다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하얀 물체를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그것이 그저 하얀 비닐봉지였음을 안다면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는다높은 곳에 오르기만 하면 겁이 나는 사람은 겁이 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될 때 그것을 기억하게 된다자신만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고소공포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상황은 바뀐다. 그 사실이 기분은 나쁠 지 모르지만 두렵지는 않다. 알고 이해하는 것이 두려움을 남기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제자: 그 말씀은 결국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생겨난 두려움을 없애지 못하고 머리 속에 담고 살아간다는 뜻이신지요?"

 

스승: 그 말이 맞다. 이해하지 못한 것들은 계속 머리 속에 남아서 떠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아주 큰 불안함과 걱정을 만들어 내지. 그것은 거대한 두려움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두려움이 되고 말지원래 처음부터 제대로 알고 이해를 했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는 두려움이 생겨난 것이다.

 

제자: 그렇군요. 그렇다면 결국 최대한 많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까?

 

스승: 책 속의 지식을 통해서 사물과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말이 맞다. 하지만 책 속의 지식은 길가에 있는 흔한 돌멩이 조차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돌멩이를 한번 더 보지 못한 사람에게 돌멩이를 책으로는 이해시킬 수 없다. 오직 돌멩이를 직접 경험한 사람만이 돌멩이를 이해할 수 있다.

 

제자: 그러면 모든 것에 대해서 경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스승: 그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모든 사물과 현상을 다 경험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인간의 경험은 오직 오감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것도 한계가 명확하다.

 

제자: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요.

 

스승: 잡초를 없앨 때 땅 위에 나와 있는 줄기를 아무리 잘라도 소용이 없다. 일주일만 지나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테니까 말이다.

 

제자: 맞습니다. 잡초를 없앨 때는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스승: 자신이 가진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대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그저 잡초의 줄기를 자르는 일이다. 두려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물과 현상을 이해 할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이해하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게 된다.

 

제자: 그렇다면 제가 어떤 존재인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스승: 일단은 지식의 힘을 빌려야 한다. 하지만 지식은 중간 다리에 불과함을, 또한 언젠가는 잊어버려야 할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중간 다리 위에서 멈춘다. 왜냐하면 지식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신이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되는 듯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식이 가진 교묘한 에고적 함정이다. 또한 지식의 종류도 중요하다잘못된 지식을 쌓게 되면 도움이 되기 보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제자: 그렇다면 어떤 지식들을 쌓아야 합니까?

 

스승우선 철학이 있다. 철학은 인간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아 온 학자들의 기록이다. 또 하나는 종교가 있다. 종교는 존재의 본질을 찾고자 했던 오래된 믿음이다. 더해서 심리학도 있다.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할 때 유용하다. 그리고 역사가 있다. 인간의 욕망과 그 한계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추가적으로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의 다양한 과학 이론들이 있다. 그것들은 이 세상을 좀 더 명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제자: 결국 다 지식이군요.

 

스승: 지식은 필요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설명했듯이 지식은 결국 불쏘시게 역할에 불과하다. 일단 장작에 불이 제대로 붙으면 그 후로는 전혀 필요 없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잘 타고 있는 불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때 나무만 넣어 주면 되니까 말이다.




 

제자: 저는 아직도 불쏘시개조차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스승: 불쏘시개를 갖는 일은 꽤나 힘들다. 오히려 그것이 가장 힘든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지.

 

제자: 그렇군요. 만약 제가 불쏘시개를 가졌다면 그 후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스승: 너는 너 자신이 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

 

제자: 왜 두려움을 갖게 되는지 미리 여쭤봐도 되는지요.

 

스승: 그것에 대해서 미리 알아도 상관은 없다. 그저 아는 것뿐이니 말이다. 네가, 아니 인간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바로 살고 싶어서 그렇다.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사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체의 일부인 인간도 살로 싶어한다. 그러니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제자: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저 역시 살고 싶어할 텐데요.

 

스승: 태어나고 살아가다가 죽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순리이기에 그렇다. 네가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순리이고, 네가 결국 죽는 것도 순리이다. 그러니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제자: 스승님은 그것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스승: 그렇다.

 

제자: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스승: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에 그렇다.

 

제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이 허공을 떠도는 먼지처럼 쓸데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까?

 

스승: 허공을 떠도는 먼지는 쓸데없지 않다. 거기에도 수 많은 미생물이 붙어서 살아 갈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제자: 그러면 스승님은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입니까?

 

스승: 먼지와 나와의 아무런 차이는 없다. 그것이 진실이다.

 

제자: 제가 어리석어서 스승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스승: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인 것은 반대의 말이 아니다. 정확히 같은 말이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이란 뜻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다, 그런 표현들은 그저 존재의 한쪽 측면만 말한 것이다.

 

제자: 그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스승: 네가 누구와 싸우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지만 또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이 말을 이해하거라.

 

제자: 그것은 그저 말장난이 아닌지요.

 

스승: 말장난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제자: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일단 싸워야 이길지 질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스승그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한계이다. , 생각해보거라. 투쟁은 너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네가 세차게 싸울수록 너는 어떤 존재가 된다. 학생이면 성적으로써, 교수면 논문 수로써, 엄마면 육아 능력으로써, 부장이면 일처리 능력으로 싸운다. 그리고 투쟁에서 이길 때 너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존재로 인정이 된다. 더해서 너 자신이 의미가 있어진다. 결국 너라는 존재의 가치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너를 가두고 있는 감옥이 된다. 네가 규정되는 순간, 너는 명확히 한계가 지어진다. 아이가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아무 것도 아니기에 그렇다.

 

제자: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스승: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공부를 못할까 봐, 논문을 제대로 못 쓸까 봐, 아이를 잘못 키울까 봐, 일을 못할 까 봐 늘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규정할 때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한다물론 그렇게 되면 어떤 의미도 없고 또한 가치도 없어지지만 새롭게 얻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계가 없어진 자신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한대의 자유를 가진 자신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닐 때는 어떤 것을 해도 최종적으로 성공이나 실패라는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는 못하는 이유는 실패할까 봐 두려워서 그렇다. 성공할 필요도, 실패해도 상관없다면 하고 싶을 것을 안 할 이유가 없다.

 

제자: 조금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성공할 필요가 없다면 왜 하는지요.

 

스승: 너는 왜 성공하고 싶어하느냐?

 

제자: 이왕 했다면 실패보다는 성공하고 싶습니다성공해야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스승: 왜 원하는 것을 얻고 싶으냐?

 

제자: .. 그것은 그냥 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스승: 맞다. 그냥 생겨나는 두려움처럼 하고 싶은 것도 그냥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두려움과 하고 싶은 것은 같은 것이게 그렇다. 두렵고 싶지 않기에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난다. 너는 성공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두렵지 않고 싶은 것이다. 처음부터 두렵지 않다면 하고 싶은 일도 생겨나지 않는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가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은 오히려 친구를 가지고 싶어한다. 살고 싶기에 두려움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생겨나기에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흔히 알려진 삶이다. 하지만 네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처음부터 아무런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제자: 그렇다면 그때는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벗어나 살고 싶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스승: 그 말은 반쯤만 맞다. 왜냐하면 살고 싶다라는 말의 반대가 살고 싶지 않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 그럼 무엇이 반대인지요?

 

스승: ‘살고 싶다의 반대는 살든 살지 않든 상관없는 것이다.

 

제자: 그게 정말로 반대의 말이 됩니까?

 

스승: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것을 이해를 하겠느냐?

 

제자: 그 말은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스승: 같은 원리이다. 좌는 우의 반대가 아니다. 좌는 우로 인해서 의미가 있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사실상 같다. 결국 우는 좌의 존재적 의미가 된다. 빛은 어둠의 존재적 의미이다. 둘은 한 쌍이기에 결코 반대가 될 수 없다. ‘살고 싶다살고 싶지 않다역시 한 쌍이다. 사람들은 살고 싶기에 자살을 한다. 살고 싶지만 살 일이 너무 두려워서 견딜 수 없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하지만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사람은 죽지 않는다. 딱히 죽을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제자: .. 뭔가 혼란스럽습니다.

 

스승: 그것이 바로 초월이다. 어떤 사람에게 완벽히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사랑도 미움도 느끼지 않아야 한다미움을 간직한 마음에는 결국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제자: 어렵지만 이해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승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것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너는 네가 가진 두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이 일어난다. 그렇게 살아도 죽어도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너는 진정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네는 그 동안 스스로 채운 살아야만 하는 이유로 가득 채워져 있기에 그렇다. 그것이 바로 네가 지금까지 평생 해 온 일이다네 안에 있는 인정의 욕구, 잘남의 욕구,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 완벽해지고 싶은 욕구가 바로 그것들이다. 하지만 네가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너는 그것을 결코 증명해 낼 수 없다. 너는 언제가 결국엔 늙고 쓸모 없어지며 죽기 때문이다.

 

제자: 앞으로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스승: 그러도록 하여라. 하지만 정진 또한 너의 두려움의 일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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