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의 두 얼굴

아이루다 2018. 8. 23. 08:29

 

사람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게 되면 그것을 행복하다고 표현한다. 단지 사람마다 하고 싶은 일이 다르고, 같다고 해도 느끼는 행복의 크기 자체는 차이가 좀 난다.

 

그런데 그런 행복은 크게 두 가지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떠난 사람은 낯선 장소에 대한 신기함, 말이나 글로만 봤던 장소를 실제 보는 기쁨,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 너무도 맑은 바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광야 등을 보면서 행복을 경험한다.

 

이것은 별이 초롱초롱한 밤하늘을 보는 행복이고,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이다. 이것은 예쁘게 옷을 차려 입고 화장을 한 후 거울을 보는 행복이고, 배가 좀 고픈 늦은 저녁에 먹는 라면을 먹는 행복이다.

 

딱히 어떤 이유가 필요하지 않으며 홀로도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이다.

 

여행을 떠난 사람은 또 다른 행복도 경험한다. 그것은 자신이 가본 나라의 숫자가 늘어나는 기쁨이며, 그런 장소를 경험하면서 살 수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랑스러움이며, 자신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는 만족감이다.

 

이것은 초롱초롱한 별을 볼 때 별 이름과 별자리를 남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다는 행복이고, 국내의 높은 산이란 산은 모두 올라봤다는 행복이다. 이것은 잘 차려 입고 나간 날 사람들의 눈길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는 행복이고, 한끼에 십 만원이 넘는 밥을 먹었다는 행복이다.

 

이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는 행복이며 반드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행복을 경험할 때는 대부분 이 둘을 모두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서로의 비중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초반엔 홀로 경험하는 행복의 비중이 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비교를 통한 행복을 변해간다. 그러다가 나중엔 비교 행복만 남게 되는 경우도 있다.

 

원래 아무리 즐겁고 좋았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지루해지는 것이다.

 

여행도 처음 가 본 곳이나 신기하지 몇 번 가면 별 감흥이 없다시골에서 매일 밤마다 초롱초롱한 별이 뜨지만 그 누구도 별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심에서 온 사람들이 훨씬 더 별을 보면서 행복해 한다.

 

자신이 집 옆에 그 유명한 피라미드가 있어서 매일 아침마다 그것을 볼 수 있다고 해도 나중엔 왜 저런 것을 보려고 그 많은 사람들이 비싼 돈을 들여서 관광을 오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연은 사계절이 있기에 아름답다. 봄의 연한 녹색 잎이 아름답고, 여름의 초록빛이 아름답고, 가을의 단풍잎이 아름다우며, 겨울의 하얗게 쌓인 눈이 아름다운 것이다. 만약 자연이 언제나 같은 색이라면 그 누구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결국 홀로 경험하는 행복은 한계가 명확하다. 행복 대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엔 지루해질 수 밖에 없고 처음에 느낀 행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만다목숨 걸고 사랑했던 연인들도 삼 년만 지나면 시들해지고 만다. 그래서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비교를 통한 행복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치의 행복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행복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하고 있는 사랑이 세상에서 유일하고 최고이며, 자신이 만나고 있는 상대가 가장 잘났다고 여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과 그런 잘난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자신의 잘남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다.

 

하지만 생각보다 상대가 그리 잘난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그 뜨겁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가게 되면 서로 실망을 하고는 이별을 하고 만다.

 

비교의 행복은 뭔가를 해봤다, 뭔가를 봤다, 뭔가를 경험했다, 뭔가를 잘 안다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이다. 그래서 이 행복은 과거의 많은 불행의 경험조차도 현재의 행복을 변화시켜주는 마법의 효과를 가졌다.

 

홀로 경험하는 행복은 본능적이고, 즉흥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생겨나는 행복이다. 비교를 통해 경험하는 행복은 계획적이며, 과거나 미래적이고의식적 판단에 의해서 생겨나는 행복이다.

 

원래 비교라는 과정 자체가 바로 생각을 통해 판단을 해야만 가능하기에 그렇다. 최초부터 어떻게 해서 어떤 모습이 되어서 행복을 얻을지를 계획하고 출발한 후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이미 이뤄 놓은 일을 회상하면서 행복해 하고, 미래에 목표에 달성한 자신을 떠올리면서 행복해 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는 없다.

 

이런 비교의 행복이 가진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의지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 같이 느끼게 된다. 그러니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삶의 목표를 가질 수 있게 해주고, 똑바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게 해주며 매일 매일 뭔가를 쌓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며 실제로도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언젠가는 비교의 행복은 홀로 경험하는 행복을 훌쩍 뛰어 넘는다. 홀로 경험하는 행복은 언제라도 포기하거나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비교의 행복은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가 되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 때, 비록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엄청난 행복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교의 행복을 통해서 삶을 사는 것이 홀로 경험하는 행복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더 나은 것일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못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비교가 가진 속성 때문에 그렇다.

 

비교는 승자가 되었을 때는 좋지만 패자가 되었을 때는 승자가 느끼는 행복의 완전한 반대만큼의 불행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불행에 더욱 더 민감하기 때문에 행복과 같은 크기의 불행을 경험할 때 훨씬 더 힘들어 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상처라는 말로 부른다. 비교를 한 후 졌을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상처이다. 그래서 상처는 반드시 어떤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생겨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매일 상처로 인해서 고통 받는다.

 

추가적으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원래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이다. 그런데 비교의 행복은 강도만 세다.

 

단순히 행복의 측면에서만 보면 한끼에 십만 원짜리를 한 번 먹는 것보다 만 원짜리를 열번 먹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지만 만 원짜리를 먹는 사람들은 비교의 행복을 경험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 비교의 행복에서 승자가 되려면 만원이 아닌 십만 원짜리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결국 횟수는 1/10로 줄고 만다.

 

왜 사람들은 자신을 전체적으로 행복한 것보다 한 번의 강렬한 행복에 더욱 더 끌릴까?

 

그것은 원래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한 것을 추구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강한 자극이 지루함을 없애는 중요한 수단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같은 길을 간다면 걷기보다는 버스를, 버스보다는 차를, 일반 차보단 고급 승용차를, 고급 승용차보다는 개인 비행기를 더 선호하게 된다. 개인 비행기를 탈 때 좀 더 행복하며 훨씬 더 자극적이며 남들에게 얘기할 만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만 원짜리를 열 번 먹지 바보처럼 십만 원짜리를 한 번 먹냐고 비난하는 것도 옳지 않다. 단지 그때 문제는 십만 원짜리를 먹었다고 자랑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백만 원짜리를 먹었다고 자랑하는 순간과 겹칠 때이다. 꽤나 치명적이다. 승자가 아니라 패자가 되는 순간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홀로 경험하는 행복은 좋긴 하지만 오래 가질 못한다. 비교를 통해 경험하는 행복 역시도 좋고 강렬하지만 그만큼이나 상처를 받을 위험성이 있고 자주 경험하기도 힘들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경험하는 행복의 대부분은 이 둘이 언제나 함께 나타나고 있다.

 


결국 딱히 답은 없다. 그나마 답을 낸다면 가능하다면 홀로 경험하는 행복을 중심에 두고 비교 행복을 곁가지로 가는 법이다. 그리고 반드시 주의를 해야 할 점은 그 어떤 경우에도 비교 행복이 우위가 되는 경우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비교 행복이 상처의 원인이고 빈도수가 낮아서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 원래 비교라는 과정에서 승자가 있다면 반드시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설령 운이 좋아서 승자가 되었더라도 그 승리엔 반드시 상처 입은 패자를 만들어냈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비교의 행복을 주로 추구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주변에서 추천하거나 혹은 좋다고 평가하는 것을 하려고 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욕망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 판단하고 결정한 욕망이라서 그렇다.

 

가봐야 할 곳 100, 해봐야 할 것 100, 옆 직원이 다녀왔다는 외국 어딘가, TV에서 보여주는 맛 집, 꼭 봐야 한다고 하는 영화나 뮤지컬, 요즘 뜨고 있다는 테마파크,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명품 가방 등등,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욕망인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매우 높기에 그렇다.

 

그럴 경우 자신이 품은 욕망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 같은 것이 되고 만다. , 숙제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삶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과 함께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낀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해야 한다고 한 것만 하고 살았으니 그렇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과 경쟁하고, 남들에게 평가 받고, 남들만큼 하고 살고, 그런 삶을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많이들 실패해서 그렇다.

 

그래서 이 사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있으며 그토록 많은 위로의 말과 글들이 유행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사방에 상처받은 사람들 천지다. 그런 상처들은 공감되고 치유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상처받은 사람들만큼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렇게 상처는 유행병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돌고 돈다.

 

물론 운이 좋게 승자의 입장에서 선 소수의 사람들조차도 결국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밟고 행복해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운이 좋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여전히 불안하다자신이 밟았듯이 언제라도 자신들도 패자가 되어서 누군가에게 밟힐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결국 행복에 관한 삶의 궁극적 방향은 홀로 행복한 것을 향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교 행복을 아예 느끼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행복을 보호하고, 상처받지 않고, 남을 밑으로 두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또한 우리 인간은 누구나 홀로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단지 그것이 남들과 비교하는 행복에 비해서 그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리 비교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일지라도 우연히 밤에 본 반딧불이 예쁘며, 맛난 것을 먹을 때 기분이 좋으며, 산에 올라 멋진 풍광을 볼 때 즐거운 법이다. 물론 금세 그런 반딧불을 본 것을, 그런 맛난 것을 먹을 것을, 그런 멋진 풍광을 본 것을 자랑하겠지만 말이다.

 

홀로 경험하는 행복들은 비록 작고 금세 사라지는 행복들이지만 그럼에도 누구나 이런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났음은 사실이다. 또한 생각보다 훨씬 더 자주 그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과도하게 비교 행복을 얻으려고 허덕이지 말고 가끔은 자신이 경험하는 대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노력해야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못 느끼기 때문에 그렇다.

 

화원에 있는 커다랗고 화려한 꽃만 예쁜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 보도블록 사이에 핀 아주 작고 잘 보이지 않는 들꽃도 자세히 보면 예쁘다. 단지 그것을 바라 볼 눈이 없는 것이다.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머리 속에 나를 잘나게 만들 생각만 가득하기에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젊은 시절엔 많이 불안하기에 그럴 수 있다. 정해진 것들이 많지 않고 뭔가 노력하면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러는 것이다. 미래가 불안하니 그렇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면 삶은 이제 거의 고정되었다. 노력을 한다고 해서 젊은 시절에 꿈꿨던 삶을 살 수 없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설령 현재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그리고 나서 작은 들꽃을 보려고 하면 된다.

 

그때 조차도 그 들꽃의 이름을 알아내고 외우려고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냥 들꽃이라고 알고 있었으면 한다. 아니면 홀로 그 들꽃에게 '앙증이' 라는 자신만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쁜 것은 예쁘고, 맛난 것은 맛나고, 즐거운 것은 즐거우면 된다.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의미를 심고, 그것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욕심만 내지 않으면 된다. 물론 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줄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것이 결국 삶을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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