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넘어서

9. 이제 그만 도망치자

아이루다 2018. 3. 7. 07:45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순간들::

 

지난 시간까지를 통해서 두려움과 그것의 변형된 형태인 지루함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어요.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죠솔직히 말해서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희망을 가질 수는 있어요. 왜냐하면 누구나 어떤 특별한 경우엔 잠시 동안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가 있거든요.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해도 그럴 수 있어요그래서 이것은 힌트가 돼요.

 

보통 사람들은 경험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경우가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으로써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할 때라든가, 도저히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기에 포기하고 받아들였다든가 하는 상황이죠.

 

아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엄마, 전쟁터에 나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군인, 커다란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오기가 생겨서 죽기 살기로 해보려고 마음 먹은 사람 등등이 바로 그런 예이죠.

 

이런 순간들은 비록 순간적이지만 죽음의 두려움이 줄어들다 못해 거의 사라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 언제나 항상 두려움이 대상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죠.

 

또 다른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말로 다한 경우에요. , 더 이상 자신은 더 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퍼부었다면 설령 그 결론이 죽음 그 자체라고 해도 그리 힘들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괴물', 한 가족이 한강에서 자란 괴생명체와 사투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죠. 그리고 이 영화 중간쯤에 그런 장면이 나와요. 할아버지 역으로 나온 변희봉씨가 가족을 향해서 손을 젓는 장면이죠. 자신은 늙어서 따라갈 수 없으니, 그냥 가라는 뜻이에요. 혹은 자신이 미끼가 될 테니 그 사이에 도망치라는 표현이죠.

 

영화 속 장면이긴 하지만, 그 순간 노인의 마음 속은 괴물에 대한 공포심이 오히려 줄어들고 평온해졌을 것이란 생각도 드네요.

 

비슷한 장면으로 리암 닐슨이 주연으로 나온 '더 그레이' 라는 작품도 있어요. 거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불만만 늘어놓았던 한 사나이가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런 말을 해요. 자신은 할 만큼 다 한 것 같다고 하면서, 이제는 그만 하고 싶다고 말하고 주인공에게 자신을 남겨두고 혼자 살아남으라고 말해요.

 

스스로 할 만큼 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 것이죠.

 

어떤 일을 해 내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퍼부었다면, 그 노력의 결과에 상관없이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져요. 실제로 삶 자체도 그렇고요.

 

그러니 마음 속에 두려움이 남아 있다면, 뭔가 더 할 수 있는 일이나 해야 할 것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뭔가를 더 하면 더 좋은 결과가 생길 것 같은 희망이 바로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실제로 그럴 수도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만약 어떤 일을 처리하고 나서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다면 후회를 하게 되면서 더욱 더 큰 두려움에 사로 잡히죠.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이 정말로 피하고 싶은 것은 실패가 아니라 무엇인가 마음 속에 남은 것일 수도 있어요. 

 

이런 원리로 인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 최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지만, 그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후회도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말로 좋아요.

 

마지막 경우는 바로 어떤 종교나 사상에 깊게 빠져들어서 그 나름대로의 신념을 갖게 된 경우이에요. 사실 이것은 두려움을 감당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종교나 사상에 자신의 두려움을 맡긴 것이기도 하죠. 그래도 그 결과는 놀라워요.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거든요.

 

 

::하지만 그것들은 어렵다::

 

이렇듯 죽음의 두려움을 줄여주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정말로 그럴 수 있는 경험을 하기란 많이 힘들어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갖는 것, 아무런 후회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죽음조차 뛰어 넘는 신념을 갖는 것이 어떻게 쉽겠어요.

 

그러니 이런 방법들을 알아도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아요. 그럼에도 정말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는 있죠.

 

그것은 바로 두 번째 방법인 최선을 다하는 삶이죠. 이것은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를 갖는 것이나, 죽음조차 뛰어넘는 신념을 갖는 것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에요.

 

이 연재 글의 초반부에 최대한 하고 싶은 일을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살아야 행복하다고 했던 말, 기억하실 것이에요. 행복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설명이었죠.

 

이것은 두려움에 관련되어서도 동일해요. 당연하죠. 행복이 바로 두려움의 줄어듦이니까요. 그래서 행복한 법이나 두려움일 줄이는 법은 동일한 해결책으로 적용돼요. 바로 최대한 하고 싶은 일을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고 하는 것이죠. 다른 말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에요.

 

최선을 다한다는 말, 이것 말고 또 어떤 의미가 있겠어요.

 

, 그러면 답이 단순해지죠. 행복해지는 것도, 두려움을 줄여서 지루함을 없애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죠.

 

 

::왜 하지 못할까::

 

그런데 이 단순한 것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바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자꾸 회피해서 그래요.


하지만 삶의 과정에서 영원히 두려움을 피할 수는 없어요. 모든 사람의 끝은 두려움이 본질인 죽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삶의 어느 시점에는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두려움 앞에 서야 해요. 그리고 그때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이뤄질 수 있죠. 또한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남은 삶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해요.

 

두려움을 화를 내지 말고, 신경질 내지 말고, 질투하지 말고, 비난하지 말고, 위로 받으려고 하지 말고, 머리를 멍하게 만들어 말고, 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잊으려고 하지 말고, 신경을 딴 데 쓰려고 하지 말고, 술 먹지 말고, 뭔가 빠져들만한 것을 찾아서 잊으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보세요.

 

모두가 하루마다 조금씩 늙고 있어요. 누구나 조금씩 매일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어요. 어린 시절에 오빠라고 불렀던 연예인들이 이제는 모두 한참 어린 동생들이 되어 있어요오빠라고 부르면 그들이 어색해 해요.

 

그런 시절은 모두 지났어요. 외모도 늙어서 덜 예뻐지고, 몸은 여기저기가 아파요. 돈은 늘어났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돈을 쓸 데는 줄고 있어요. 젊은 시절엔 돈과 시간이 없어서 못 놀았는데, 나이를 먹으니 돈과 시간은 있지만 놀 것이 없어요.

 


인정할 것을 인정하세요. 매일 두려움의 크기는 커지기에 지루함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이것을 외면하는 것은 늙었다고 해서 거울을 보지 않는 것이에요. 몸은 살이 쪄서 예전에 산 옷들이 맞지 않는데 체중계에 올라서지 않고 있는 것이에요.

 

진실을 보세요. 사람이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은 잘못이 아니에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누구나 그렇고,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어요.

 

자신의 두려움을 바라볼 수 있을 때그것에 대응하는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을 때 두려움의 크기가 줄어요.

 

 

::최선이란 말의 경계지점::

 

이것과 함께 또 하나 다뤄야 할 점은 바로 최선을 다했다는 판단 기준점이에요. ,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최선을 다한 것인가요?

 

'127시간' 이란 영화가 있었어요. 외딴 곳에서 팔이 바위 틈에 끼어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상태가 된 주인공이 결국 스스로 팔을 잘라내고 살아나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다룬 작품이죠.

 

이 주인공은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도저히 팔을 자를 용기가 없는 사람이나, 팔을 자를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팔이 잘릴 때 감당해야 할 고통이 끔찍해서 그냥 있는 사람이나, 결국 그렇게 살아나더라도 한 팔로 살 생각이 끔찍해서 실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닌가요?

 

도대체 어디까지가 최선일까요? 어디까지 버티고, 어디까지 해봐야 그것을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 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요? 10명 중에서 10명이 손을 들어 주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류 전체 70억 인구가 모두 그렇다고 말해줘야 하는 것일까요?

 

자신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팔을 자를 용기가 없었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결국엔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닌 것일까요이것을 각자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것은 절대적인 수준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이 다수의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내고 또한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에요. 어쩌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일 수 있으니까요.

 

그나마 이런 경우는 반드시 해야 하는 생존 그 자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요. 그렇다면 각자가 느끼는 욕망은 어떨까요? 어느 선까지 욕망을 가지고 실현해야 그것이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것일까요?

 

예를 들어서 '얼마를 주면 똥을 먹을 것인가?' , '얼마를 주면 감옥에 1년간 다녀오겠는가?' 라는 질문들을 생각해보죠이때 얼마에 그것들을 할 수 있어야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것일까요?

 

1억 정도는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최선을 다해야 하니 10만원에도 똥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요?

 

혹은 이런 경우도 생각해봐야 해요. 어떤 사람은 얼마를 주든 똥을 먹지도, 감옥에 가지도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이에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겠다는 의지이죠하지만 그런 사람조차도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 있다면 얼마든지 똥을 먹거나 감옥에 가겠죠.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자신이 욕망을 위해서는 거부했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받아들였어요. 이것은 최선을 다한다는 말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흔히 쓰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결국 '무엇인가를 위해서', 즉 어떤 가치나 의미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최선은 노력의 정도가 아니라 결국 자신이 지키고 싶은 의미나 가치가 얼마나 크고 중요한 것에 관련된 거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에요.

 

이 질문의 답을 내기 위해서 중요한 가치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요단순해요. 지키고 싶은 것이에요. 그것을 잃었을 때 엄청난 불행을 경험할 일이죠. 이 말은 잃었을 때의 두려움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 되겠죠.

 

그래서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며,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가치가 있죠.

 

결국 큰 두려움은 큰 의지력이에요. 큰 의지력은 최선을 다하는 정도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게 해주죠. 너무도 단순하고 명확한 흐름이에요.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그 두려움을 제대로 바라보면 볼수록 최선을 다하게 돼요. 그런데 두려움의 크기 자체는 개인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아이가 소중한 것을 선택할 수는 없거든요. 하지만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에요.

 

그러니 만약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자신의 두려움을 회피하고 있다는 말이 되죠. 특히나 요즘 시대엔 지루함으로 변형된 두려움 말이에요.

 

 

::왜 인간관계가 힘들까::

 

기본적으로 지루함은 절실함이 사라진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당장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니까요.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해결해야 할 두려움이니, 지금 이 순간 그것을 감당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절실함이 없죠. 그로 인해서 회피도 가능하고, 미루는 것도 가능해요.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죠. 그러니 아무리 회피를 해도 결국 감당할 수 밖에 없어요. 더군다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커지기만 할 뿐, 결코 줄어들지는 않아요. 운동의 필요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커지기만 해요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면 지루함은 점점 더 커지게 되고, 결국 그것은 점점 더 불안함을 느끼게 해요.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불안함이 결국 사람의 감정을 끝없이 뒤흔들게 돼요. ,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는데, 주로 나쁜 감정 쪽으로 향하죠. 그래서 외부 자극에서 과하게 반응해요. 그래서 결국 주변 사람들이 그런 감정적 흔들림에 지쳐서 떠나가죠.

 

누가 좋아하겠어요. 감정이 럭비공처럼 튀어서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을 말이에요. 인간관계에서 있어서 가장 기본은 바로 예측 가능성이에요. 갑자기 화를 내고, 갑자기 웃고 하는 사람은 함께 있는 것이 불안해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요.

 

관계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불안한 사람이 되면 결국 관계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져요. 친구나 지인들이 있긴 하겠지만 그 범위가 아주 좁아지고, 또한 평판이나 평가도 그다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 결국 불행해지고 말죠.

 

사람들은 매일 지루함을 회피하기 위해서 노력해요. 그러다가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해결을 하려고 하죠. 이것을 아주 단순히 표현하면, 매일 TV를 보고 지내다가 1년에 한 번 정도 해외 여행을 떠나는 것이에요.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안되죠. 결국 지루함은 끝도없이 밀려오고,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지쳐서 결국 가장 효과적으로 지루함을 잊는 방법, 바로 망각을 써요. 그냥 잊는 것이죠.

 

나이를 먹을수록 TV 앞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이유에요. 잊고 살다가 보면 생각하기도 싫거든요. 그것은 마치 냉동실에 들어있는 한 5년쯤 전에 넣어 둔 고기와 같아요. 있다는 것을 아주 가끔 생각하지만, 먹지도 버리지도 않죠. 먹기엔 찜찜하고, 버리기엔 귀찮거든요.

 

각자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온전히 개인적인 문제에요.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면 그만 외면해야 해요. 두려움과 지루함에 사로잡힌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거든요. 냉동실이 고기는 이제 그만 버려야 해요. 그리고 오늘 그것을 하며 하루 종일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에요. 바로 그것이 행복의 열쇠임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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