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공감과 감정이입

아이루다 2017. 11. 23. 07:41

 

다른 사람이 느낀 감정을 그 자신도 느끼는 것, 이런 인간의 감정 능력을 보통 공감이라고 칭한다. 혹은 다른 말로 감정이입이라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공감과 감정이입, 이 두 단어는 매우 혼란스럽게 혼용이 되고 있는 편이다. 이것은 특히 영어가 한국어로 번역될 때 더욱 더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sympathy 라는 단어는 보통 공감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저 동정이나 연민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empathy 이란 단어는 감정이입이란 말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것이 공감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두 단어는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런 혼선이 존재한다.

 

이것은 해석하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심지어 사전들마다 다르다. 그러니 이것을 정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면밀히 말하면 이 두 단어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나타나는 현상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 내면의 흐름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sympathy를 공감으로, empathy 를 감정이입으로 해석하는 것이 좀 더 맞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공감과 감정이입의 공통점부터 좀 더 알아보자.

 

일단 이 둘은 모두 나쁜 감정 상태에 놓인 다른 사람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좋은 감정에 대한 공감이나 감정이입도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통 남 잘못된 것은 같이 슬퍼해줘도 남이 잘 된 것은 같이 기뻐해주기 보다는 대부분 질투하거나 부러워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보다는 불행에 훨씬 더 잘 민감하다. 상대적 행복도 얻기 때문이다.

 

결국 공감이나 감정이입은 각자의 내면에서 홀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적 반응으로 인해서 촉발된 감정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감정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경험이 아닌, 결국 그 자신의 경험이다. , 누군가 팔을 다쳐서 아파할 때, 자신도 어딘가를 아파 본 경험이 있어야 그것에 대해 공감이나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 능력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둘 중 하나인데, 첫째는 너무 좋은 조건에 잘나게 태어나서 인생의 쓴맛을 별로 본 적이 없어서 타인의 상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사이코패스인 경우이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이나 감정이입의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능력들을 가지게 되었을까?

 

답은 단순하다. 인간이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만 된다면 끝없이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려고 든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특징은 다수가 함께 모여서 사는 사회를 구성할 때 아주 큰 문제를 일으킨다.

 

혼자 살면 이기적이든 아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모여 살게 되면 이기적인 행동들은 수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근본적 원인이 된다. 함께 힘을 모아서 얻은 사냥감을 서로 좋은 부위를 가지려고 하면, 어떻게 그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인간의 사회는 반드시 원칙과 질서에 근거한 공평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게 됨으로써 자연계에서 강자가 되었다. , 인간의 사회 구성 능력은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를 구성해서 살아야 하는데, 각자가 너무도 이기적이라서 계속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해결책이 바로 이 공감과 감정이입이었다. ,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음으로써 자신을 위한 무한대의 이기심을 추구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어느 정도 배가 부르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서 싸우기 보다는 서로 조금 양보하면서 사는 법을 체득한 것이다. 그것이 전체에게 그리고 각자 자신에게도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인간에게 이런 공감능력이나 감정이입 능력이 발달하지 못했다면, 인간은 결코 이런 대규모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서 이런 문명도 발달시키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극단적으로 이득을 추구하는 무리들은 결국 언젠가는 반드시 멸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좀 먹고 살만하게 된 인류는 그런 능력의 범위를 지구 전체의 생명체에게로 확장 중이다.

 

여기까지 해서 공감과 감정이입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살펴봤다. 그럼 이제부터 공감과 감정이입의 차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기본적으로 이 두 감정은 외부에 있는 다른 사람의 감정적 경험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런데 이때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적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감정적 경험을 끄집어 낸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이 어떤 감정적 상태일지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한다. , 최종 결과가 타인을 향해 있다.

 

반면에 감정이입은 상대의 감정적 경험을 통해 자신이 바로 그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만다. , 최종 결과가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있다.

 

예를 들어서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을 보고는 너무 화가 나서 방방 뛰는 사람의 경우가 바로 감정이입이다. 주인공이 겪고 있는 그 상황을 자기 자신에게 주입해서 감정이입을 한 후 생각해보니 너무도 화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이입이 심한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끝까지 마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너무 슬퍼서 차마 볼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무서워서 공포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공포가 그 자신에게 그대로 옮겨와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감당하기 힘든 분노, 공포, 슬픔 등을 감정이입하게 되면, 본인이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공감은 다르다. 공감은 슬픈 일을 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끼긴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것을 본다. 그래서 '너 참 힘들구나' 라고 생각해준다. 그래서 이해가 일어나고 위로를 해줄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 말 그대로 공감해준다.

 

꼭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어릴 때 주로 감정이입을 자주 경험하고, 어른이 된 후 비로소 공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감정이입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에 불과하지만, 공감은 판단이라는 이성적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감정이입은 상대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만, 공감은 상대의 모든 입장을 다 고려해서 복합적으로 판단한 후,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전에 이상섭이란 분이 쓴 문학비평용어사전에 보면 감정이입은 육체적이고 본능적이며, 공감은 지적이고 사상적이란 설명이 있을 정도이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를 만든다.

 

감정이입은 그 사람이 불안한 상태일수록 더욱 더 강하게 나타난다. 아이들에게서 감정이입이 잘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두려움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불안하니, 조금의 외부 자극만 있어도 크게 출렁이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자극에도 훨씬 더 큰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조금 힘들다고 말했는데, 그것에 격분을 해서 참지 못하고 더 큰 화를 내는 사람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조금 슬픈 일을 말했는데, 듣는 사람이 더 슬프게 우는 경우이다. 조금 기쁜 일을 말했는데, 너무도 좋아하는 경우이다.

 

이런 식으로 감정 당사자보다 더 큰 감정적 반응을 보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스러워 하게 된다. 그리고는 왜 저러지 하는 생각도 한다. 속상한 일을 당한 자신보다 더 크게 속상해 하면, 처음에 좋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감정적 불안함으로 인해 발생된다. 이미 내면에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돌 하나만 던져도 폭풍이 일어나는 것이다.

 

반대로 평온한 상태인 사람들의 경우엔 좀처럼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다. 대신 눈 앞에 있는 상대의 사연을 듣게 되면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그 사람의 감정을 판단하고 결국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깊은 내면의 위로의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공감이다.

 

그래서 공감은 많은 삶의 경험과 그에 따른 지혜를 필요로 한다. 인간을 이해하고, 삶을 더 깊게 이해할수록 공감의 깊이는 점점 더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게 일어나는 반응을 공감으로 인식한다. , 그저 감정이입을 해서 자신처럼 슬퍼하고, 자신처럼 기뻐하는 사람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반응일 뿐이다.

 

진정한 이해는 감정이입이 아닌 공감을 통해서 일어난다하지만 공감은 당장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깊은 내면엔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임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감응이다.

 

영어로 반응은 reaction이다. 그리고 감응은 response이다. 그런데 response 이 감응이란 뜻으로 쓰일 때 동의어가 바로 sympathy 이다. , sympathy 에 바로 감응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것을 근거로 sympathy 를 공감으로, empathy 를 감정이입으로 정의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감정적 경험을 매우 신뢰한다. , 자신이 뭔가를 느끼면, 그것이 진짜로 가치가 있고 반드시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진심 어린 마음, 순수한 감정과 같은 단어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감정의 진짜 특징은 바로 끝없는 변덕이다. , 지금 당장은 죽을 듯 슬프다가도 몇 달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아니, 하루에도 수없이 감정이 변한다.

 

그런데 그렇게 변덕스러운 자신의 감정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니 감정이입을 공감인 듯 착각하는 것이다.

 

공감은 감정적 반응이 아니다. 물론 감정을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긴 하지만, 이것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 물리학 법칙들이 변하지 않듯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망가지지 않는 한, 그 공감은 영원히 유효하다. 하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해서, 자주 없는 듯 느껴지는 것이다.

 


아이가 다쳐서 울면 엄마는 같이 속상해 한다. 하지만 아빠는 다친 곳을 확인하고 약국에서 약을 바를지, 병원에 데려갈지를 판단한다.

 

이런 경우에 엄마는 공감능력이 있고 아빠는 그렇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그저 여자는 일반적으로 감정이입에 특화되어 있고, 남자는 해결능력에 특화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남자들은 왜 그렇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믿음과 다르게 제대로 된 공감능력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제대로 된 공감능력을 가질 수 있는 필수조건이 바로 평온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 감정적으로 흔들림이 최소화되어 있어야 한다. 감정이 쉽게 흔들리는 사람은 무조건 감정적 반응부터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감정이입 상태에서 머물 뿐, 결코 공감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조건의 까다로움으로 인해서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 자체가 참으로 드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감정이입을 자주 경험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을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살아가긴 하지만 말이다.

 

공감능력을 갖기 위해 필요한 평온함의 조건으로는 바로 자신이 가진 근원적 두려움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임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두려움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분리된 객관적 상태가 바로 단순한 감정이입이 아닌, 깊은 공감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어떤 감정이 여전히 내면에 존재한다면 그것을 자극하는 외부의 사건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격한 감정적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보다 감정이입을 훨씬 더 자주 경험하는 이유는, 사실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거의 그대로 품은 채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자신이 몸이 큰 어른이 되었기에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많이 벗어났다고 믿지만, 사실은 아직도 그 어린 시절의 두려움은 그저 깊게 숨겨져서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결국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로 인해서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을 경험하기 보다는 감정이입을 하고는 결국 감정적 반응만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렇게 하는 것을 공감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라는 진정 바라는 공감은 내가 힘들 때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힘듦을 깊이 이해해주고 그저 담담한 얼굴로 안아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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