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중국의 통일, 진시황제

아이루다 2017. 9. 2. 07:03

 

주나라 봉국들의 반란으로 시작된 춘추시대는 수백 년에 걸쳐 서로 이합집산을 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 일곱개의 나라로 정리가 된다. 이때가 바로 춘추전국시대 중에서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일곱 나라는 한나라, 조나라, 연나라, 위나라, 초나라, 제나라 그리고 진()나라였다이 중에서 한, , 조나라는 춘추시대에 가장 강력했던 진()나라가 세 개로 분열된 나라들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나뉘기 전의 진()나라가 존재했다면, 진시황제도 나타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 기억이 날지 모르겠지만, 나뉘기 전의 진()나라는 바로 영임호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른 희중이가 패주에 오른 나라였다. 그리고 최종 승리자가 되는 진()나라는 바로 영임호가 다스렸던 나라이다. 이 두 나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대립과 화친을 반복하면서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루다가 결국 영임호의 후손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최초의 통일 왕국인 진()나라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제의 성이 '' 씨이다. 그의 이름은 ''으로 영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다.

 

서양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다면, 동양엔 진시황제가 있었다. 물론 이 둘은 많이 차이가 나긴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작은 그리스에서 시작해서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이르렀던 대제국을 건설한, 정복형 왕이었고, 진시황제는 일곱 개로 분열된 중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한 왕이었다.

 

그럼에도 시기적으로도 비슷하고, 그 끝도 비슷하다이 둘 모두 사후에 자신들이 세운 제국이 곧바로 붕괴되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두 명은 인류 문명 발달 순서상 반드시 나와야 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제자백가의 철학이나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에 민주주의와 철학이 만개한 것처럼 말이다.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를 강국으로 키워 낸 그의 부왕의 업적을 등에 업고 시작했듯이, 진시황제 역시도 그가 중국을 통일한 것은 단지 본인의 능력으로만 이뤄낸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조상이었던 영거량이란 인물의 탁월한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거량이 왕위에 오를 무렵 진국은 언제든 타국에 흡수되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쇠락해가는 나라였다. 그런데 영거량은 야심이 있는 인물이었고과거 영임호의 시대, 즉 패주의 시기에 강성했던 진국의 영화를 다시 돌이킬 수 있길 바랬다.

 

그런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한 인물을 얻었기 때문이다그 인물의 이름이 바로 공손앙이다.

 

공손앙은 위국 출생이었지만, 위국의 왕이 공손앙의 능력을 담을 그릇이 되지 않아 결국 진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진국의 왕인 영거량을 만나 몇날 며칠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흡사 그 모습이 과거 관중과 만난 강소백과 비슷했다.

 

아무튼 서로의 생각을 듣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진국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강력한 정책을 편다. 공손앙은 원래 법가 태생인데, 법가는 인과 의로 다스리라는 유가의 입장과는 달리, 정확한 통치 체계 안에서 강력한 제어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주장하는 학파였다.

 

,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어차피 따라오지 못하니 이끌고 가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교화를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교육 시스템에 제대로 갖춰지지 않을 경우, 사실상 별 공염불이 될 위험이 컸다. 그러니 당시 사회 시스템을 고려하면 훨씬 실리적인 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법가에서 주장하는 정책들은 바로 현실 속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훨씬 우월했다. 학자들은 유가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통치자들은 법가를 좋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시황제 역시도 법가를 추종했다.

 

공손앙은 영거량을 만나서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 학문을 의심하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
어떤 조치를 취할 때 회의를 품어서도 성공할 수 없다
.
-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은 세상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기 마련이다
.
-
어리석은 사람과는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논의해서는 안 된다
.
-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면 개혁뿐이다.

 

그리고 공손앙은 영거량의 강력한 후원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는데, 그것이 다음과 같다.

 

1) 백성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강제로 가르침. (도덕교육)
2)
도량형제도 통일. 전국적으로 같은 표준의 수치로 자와 저울 그리고 됫박을 사용하도록 함

3)
지방정부 체계 확립
4)
사회의 기초조직 세움. 일종의 강제적 연좌제도
5)
모든 국민에게 정당한 직업을 갖도록 함. 부유한 집 자제라도 놀고 먹으면 변방으로 보내버림
6)
진국으로 이민 장려
7)
생산 장려. 옷감을 잘 짜고,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자는 부역세와 노역 면제
8)
한 집안에 성인 남자는 무조건 한 명으로 제한
9)
사람끼리의 다툼은 법적으로 해결. 개인간 폭력은 금지
10)
적과 싸우는 것을 1등 공적으로 치하
11)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자는 반드시 승진시킴. 귀족이라도 전공이 없으면 정부의 관직을 맡을 수 없음

 

하나하나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필수적인 정책들인가? 2천년 전의 공손앙이 주장한 개혁정치는 현대 시대에 그래도 적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훌륭하다그렇게나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의 머리에서 나온 정책이라고 믿기가 힘들 정도이다.

 

사실 중국의 문명은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에나 서구 문명에 뒤쳐질 뿐, 그 전까지는 모든 방면에서 우월했다. 독자적인 문화였지만, 초창기에 자리를 잘 잡은 덕분에 그런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공손앙, 상앙이라고 불림, 출처 : http://pgtyman.tistory.com/entry>


아무튼 이런 공손앙의 개혁정책으로 인해서 진국은 19년에 동안 강력한 나라로 변모한다. 공손앙의 이 개혁정책은 '변법' 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훗날 일본에서 일어난 메이지유신의 초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공손앙은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영거량이 죽은 후, 그에게 불만을 품었던 귀족 세력들에 의해 모함을 당하고 다음 왕위에 오른 영사에 의해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영사는 진국이 진나라로 변하는 시기에 존재했던 왕으로 최초의 진국 역사상 최초의 왕칭호를 받는다. , 그는 혜문왕이 된다.

 

영사 뒤로 왕위에 오른 왕은 영탕으로 '무왕' 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소양왕, 효문왕, 장양왕을 거쳐 마지막으로 시황제가 출현한다.

 

하지만 시황제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아니, 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장양왕은 적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의 아버지는 적자도 아닌데다가 장자도 아닌, 그야말로 사실상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왕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경쟁하고 있는 왕자들의 숫자만 해도 20명이었다.

 

장양왕의 젊은 시절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는 처지로 채워졌다. 사실 이것만 봐도 장양왕의 처지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왕이 자기 자식 중에서 한 명을 볼모로 보내야 한다면, 그는 바로 당연히 가장 관심이 없는 아들일 것이다. , 장양왕은 그의 아버지 효문왕에게 있어서 버린 자식이었다.

 

장양왕의 이름은 영이로써 자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는 한 인물을 만남으로써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그 인물이 바로 여불위라는 사람이다.

 

여불위는 원래 상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성공하여, 그의 부가 일국의 재산과 맞먹을 정도의 부를 축척한 인물인데, 그는 영이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삶의 궤도를 수정한다. , 장사에서 정치로 방향을 튼 것이다.

 

여불위는 영이를 만난 후, 그의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부친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당시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고 한다.

 

농사를 지어 수확을 걷으면 얼마만큼의 이득을 기대할 수 있나아버지의 답은 10배였다.

금은보화를 거래하면 얼마만큼의 이득을 기대할 수 있나아버지의 답은 100배였다.

정치에 뛰어들어 군주를 옹립하면 얼마만큼의 이득을 기대할 수 있나아버지의 답은 '무수' 였다. , 셀수 없다는 뜻이다.

 

여불위는 뛰어난 상인이었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이에게 투자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영이의 왕위 승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위해 몇 가지 계책을 꾸민다.

 

첫 번째는 영이의 처소를 아주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다. 그래서 영이에 대한 좋은 소문을 지속적으로 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실제로 왕위 결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화영부인을 설득하는 일이었는데, 화양부인은 당시 왕인 효문왕의 정실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지 못한 비운의 왕비였다. 그래도 그녀에 대한 효문왕의 사랑은 지극했기에, 그녀의 선택이 차기 왕위를 결정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을 직접적으로 설득하는 하수를 두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남동생인 양천군을 찾아가 현재 왕이 죽은 후, 화양부인이 누리는 권력에 문제가 생길 것을 지적하면서 영이가 왕위에 올라야 그 권력이 유지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이것은 사실 말이 설득이지, 일종의 계약인 셈이다.

 

원래 여자의 권력은 남자로부터 나온다. 만약 화양부인이 자녀가 있어서 자식이 왕위에 올랐다면 그녀는 태후로써 충분히 권력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이 없었기에 다른 후처의 자식들 중 하나가 왕위에 오른 후, 배신이라도 하게 되면 정말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여불위가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영이를 왕위로 옹립해주면, 확실히 뒤를 책임져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니 양천군이 이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여불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화양부인의 언니인 화양대저에게 금은보화를 선물로 주면서 일체 정치적인 수사 없이, 순수하게 영이를 소개한다.

 

이 얼마나 날카로운 수완인가 싶다. 남자에게는 이성적인 설득을, 여자에게는 보석을 통한 감정에 호소한 것이다.

 

이렇게 동생과 언니로부터 동시에 영이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된 화양부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영이임에도 그에게 호감이 생기는 일은 당연한 순서였다. 제 삼자에게 들었다면 의심을 했겠지만, 자신의 친 언니와 친 동생이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당연히 귀담아 듣게 된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20명의 왕자가 다 그만 그만 했을 것이다. 누구를 선택해도 자기 자식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이 간다면? 그리고 현재 왕의 사후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시켜주기로 약속했다면? 그러니 화영부인의 선택은 자명한 일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이후 효문왕을 지속적을 설득해서 영이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서 차기 후계자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영이가 왕위에 올라 장양왕이 되지만, 운없게도 그는 3 만에 죽게 된다. 그래서 그 뒤를 이어 영정이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어린 왕이 왕위에 오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바로 섭정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섭정을 해야 하는 것은 주로 왕의 엄마가 하게 된다. 선왕비가 아니면 사실 누가 하겠는가?

 

문제는 장양왕이 40도 안된 젊은 나이에 죽었기에 시황제의 어머니도 아직 젊었고 더군다나 두 명이나 되는 강력하고도 아직도 젊은 할머니들이 있었다그러니 친할머니인 하태후, 의할머니인 화양태후 그리고 시황제의 친모인 제태후, 이 세사람의 삼파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섭정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바로 시황제의 친모, 즉 장양왕의 정실이었던 제태후였다그녀의 그런 능력에는 바로 여불위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태후인 조희는 장양왕이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여불위와도 관계를 맺었던 여인인데, 장양왕이 여불위에게 그녀가 마음에 든다고 하자, 그녀를 장양왕에게 주면서 연을 맺게 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사실 시황제의 태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그가 바로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설이다. 사실 설 수준이 아니라,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명확한 것은 아니기에 지금은 그냥 장양와의 친자식이라는 설이 가장 신빙성 있게 믿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조희는 원래 여불위에 잠자리를 함께 하던 사이였기에, 젊어서 남편을 잃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진나라에 와서 정을 붙일 사람이라고는 여불위 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 사이는 정략적인 관계를 떠나 연인으로써 맺어져 있었는데, 현명한 여불위는 그 위험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어리지만 시황제가 성장을 해서 섭정에서 벗어나게 될 때, 자신의 신하가 자신의 친모와 놀아난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할까? 그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조희에게 자신이 데리고 있던 한 남자를 소개시켜 주는데,  남자의 이름이 바로 노애이다.

 

노애에 관련된 이야기로는, 아주 큰 성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참 남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조희의 외로움을 달래주기엔 최고의 남자였던 듯 하다.

 

노애는 이후 시황제의 이복동생인 성교의 난을 진압하면서 귀족의 지위에까지 오르면서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장성한 시황제에 의해서 숙청당하고 만다.

 

또한 시황제는 여불위마저 숙청을 하는데, 그때 여불위의 나이 57세이다. 여불위는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상인으로 기록되기도 해서, 사실 이름만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꽤나 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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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에서 발견된 꺾창, 한문으로 상방 여불위라고 적혀있다. 출처 : 나무위키>


장성해서 섭정에서 벗어난 시황제는 법가 사상을 추종했으며그 중에서도 한비자의 사상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한비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과거 공손앙처럼 크게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아마도 한비자가 살아서 시황제를 보필했다면, 어쩌면 그가 그렇게 폭군으로 끝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비자는 재능 기준의 관리 선발, 모든 결과에 대한 신상필벌국가의 정책에 대한 공공성을 강조하고 개인적 친분으로 이뤄지는 결정을 막아야 한다고 했으며, 법 집행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사상을 펼쳤다. 그리고 이 사상은 시황제에게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문제는 너무 엄격했다는 점이다.

 

시황제는 BC 230년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8년 조나라를 멸망시켰으며, BC 226년 연나라를 점령하여 BC 222년 스스로 망하도록 만들었고, BC 225년에 조나라를 멸망시켰으며, BC 226년에 초나라를 공격하여 BC 223년에 멸망시킨다. 그리고 그는 BC 221년에 가장 강력했던 제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 전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그는 고대 중국의 신화시대에 있었던 35제 중 '' 자와 '' 자를 따서 스스로를 '황제' 라고 칭하며, 중국 최초의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이 황제라는 칭호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왕을 칭하는 고유 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진시황은 꼼꼼한 성격으로써 정책 하나 하나를 직접 챙겼다고 알려져 있으며,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최대한 좋은 인재를 수급하려고 애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신하들의 간언을 잘 듣고 따르는 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성실하게 노력하고 부지런한 성격이었으며, 유능하고 수용성이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단지 그는 법가 사상에 너무 빠져들어서 법가를 제외한 나머지 사상을 너무도 싫어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학문 말살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제자백가들이 너무 시끄러우니, 그들의 사상을 담음 사상집을 모두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시황제는 폭군의 이지미가 되고 만다.

 

시황제는 중국 최초로 행정구역을 정비하여 군과 현으로 나누었는데, 특히 군의 장을 '' 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붙이면 군수가 된다. 그래서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군과 군수의 칭호는 아마도 시황제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산발적으로 발전된 문자를 모아서 하나의 통일된 문자로 정형화시켰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레바퀴의 크기와 폭을 통일시켜 도로의 폭을 공식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끔 했다.

 

그는 화폐도 통일했고, 법령도 통일해서 모든 법령이 공식화된 구조를 갖게 한다. 그리고 그는 필요하지만, 너무 무리한 공사를 하나 하는데, 그것이 바로 만리장성의 건설이었다.

 

북쪽 흉노족을 경계해 단 사년만에 건설된 만리장성이지만, 백만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고, 이 공사의 험난함으로 인해 당시 인구의 5%가 사라졌다는 설이 있을만큼 가혹한 공사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마도 진나라가 시황제 사후 금세 무너져버린 것은 분서갱유의 문제가 아니라, 이 만리장성 축조에 따른 백성들의 불만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시황제가 한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 많다. 통일된 문자, 도량형, 도로 폭 등은 국가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정책들이다. 그래서 이런 시황제의 정책은 이후 중국 문명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문제는 그의 왕국은 그의 사후에 금세 무너져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이후 두 명이 영웅이 출현하는데, 그들이 바로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패왕이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좀 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그리고 여기까지 해서 중국 고대사 편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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