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세대 충돌

아이루다 2017. 7. 23. 07:53

 

 

요즘 사회에는 '꼰대' 라는 말이 꽤나 유행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 퍼지는 말인데, 아무튼 좋은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꼰대에는 주로 나이를 제법 먹은 분들이 속해있다. , 상황에 따라서는 젊은 꼰대도 있긴 하다.

 

그리고 꼰대질을 하는 나이 먹은 사람들과 꼰대질을 당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이 바로 '먹고 살만 하다는 것' 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흔한 모습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상기하면서, 지금보다 훨씬 어렵게 살았던 그 시절에 이 악물고 노력했던 과거처럼 살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풍요로운 시절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불만도 많고, 열심히 살지도 않느냐고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 질책한다.

 

이분에게 있어서 먹고 사는 것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말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입장은 다르다. 소위 말해서 기성 시대가 말하는 '먹고 사는 것' 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먹고 사는 것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그러니 당연히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얻기가 너무도 힘들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양쪽 주장을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면 사실 동시에 옳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성 세대의 말처럼 요즘 젊은 사람들이 예전 시대와는 달리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 독기가 없어진 것도 사실이며하지만 청년 세대의 주장처럼 과거에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지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도 말도 안되고, 훨씬 더 현실적으로 심각한 것은 도대체 열심히 한다고 해서 결코 잘될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 요즘 시대에 성공의 사다리는 이미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쳐져 있다. 요즘 세대는 개천에서 용날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두 세대의 주장을 잠시 좀 생각해보면인간 행복에 대한 흥미롭고도 본질적인 면이 살짝 드러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 발생하는 원인, 즉 두려움과 지루함에 대한 숨겨진 단서이다.

 

기성 세대에게 있어서 행복은 '두려움' 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 당장 밥을 굶지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안정하고 마음 편한 것이 행복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 행복은 '지루함' 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 당장 밥을 굶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한 것도 아니고, 미래가 준비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

 


기성 세대는 당장의 두려움을 해결하면 되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해왔다. 돈만 벌 수 있다면, 그 일의 비전이 있는지, 그 일을 해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그것이 안 통한다. 그들은 비전을 원하고, 직장에 대한 만족도를 따진다. 그래야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삶을 결정하는 원인이 두려움인지 아니면 지루함인지에 따른 차이이다. 원래 두려움은 현재에 대한 걱정이고, 지루함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다.

 

사실 행복에 대한 이런 두 입장은 아주 오래된 주제로 보이긴 하지만, 사실 인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만 없으면 행복하다고 믿어왔다. 수천 년에 걸친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이 그랬다지루함을 없애는 것이 행복한 것이란 생각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루함은 예전에 먹고 살만했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최근에 와서야 평균 수명이 올라가고, 먹고 사는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기에 나타나는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먹고 사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문제였다. 실제로 50년 전만 해도 매년 봄마다 보릿고개가 있었으며, 정말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의 기성 세대는 그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렇기에 이를 악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배가 고플 때 가장 불행하며, 그 불행 속에 있을 때 정말로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하게 된다. 일만 할 수 있다면, 그 일이 무슨 일인지 가리지 않게 된다. 비전이나 만족도를 따지는 것은 사치이다.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든지 열심히 공부할 수도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젊은 시절에 온갖 고생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까지도 나왔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한다.

 

원래 사람은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그런 두려움이 없다. 설령 일부러 경험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요즘 세상은 너무도 먹을 것이 많다. 그래서 살아오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본 적 없는, 음식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왔고, 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젊은 세대는 두려움의 세대가 아닌, 지루함의 세대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지루함을 극복하는 것은 선택적이다. ,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이때 사람은 가능하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한다. 모든 것이 선택적이라면, 누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할까?

 

당연히 하고 싶은 일을 한다. , 욕망이 원하는 일을 한다. 그것은 당연히 먹는 것이 아니라, 잘 먹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당장 월급을 준다고 해서 아무데나 취직을 하지 않는다. 미래가 없으니까 그렇다. 하지만 그러면서 놀고 있으니, 기성 세대는 그들의 정신 상태를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생각해보면 기성 세대의 비난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몇 십 년 사이에 세상 자체가 바뀐 것이다. 이미 세상은 두려움의 시대에서 지루함의 시대로 바뀌었다. 사실 기성 세대들도 현재는 지루함을 감당하지 못해서 죽을 지경이다. 매일 무엇을 하고 시간을 보낼 지가 걱정이다. 그러니 매일 산에 오른다. 별로 재미도 없는 친구들을 만난다. 매일 모여서 누군가를 뒷담화한다모두 지루하니, 그러는 것이다.

 

단지 기성 세대가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기성 세대는 아직도 자신이 경험했던 시대 속에 갇혀 있으며,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물론 인생을 좀 더 산 경험자로써 젊은 세대에게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그들이 주구장창 말하고 있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조언이 도대체 왜 문제가 되겠는가?

 

생각해보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조언만큼 좋은 조언도 없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의 이 조언을 뱀을 보듯 혐오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왜 이런 오해가 일어날까?

 

, 사실 오해는 아니다. 하지만 나이 먹은 사람들의 이런 행동은 상대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아는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이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게 위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말을 던지는 것이다. 상대가 받을 생각도 없는데 그냥 던진다.

 


그러니 공감을 느끼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그저 자신의 감정이 불편하니, 상대방에게 풀어 버리는 것이다.

 

이때 나오는 조언들은 지극히 이성적 표현이다. 말도 되고 나름대로 일리도 있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 감정이 움직여야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의 정말로 긍정적으로 바꿔주고 싶다면, 그들의 감정을 움직여야 한다. , 공감을 얻어야 한다.

 

원래 설득은 논리적이라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설득하지만, 설득은 원래부터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설득은 감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설득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꼰대들은 조언을 한답시고 이성적으로만 접근한다. 그래서 들어보면 맞는 소리이긴 한데, 결론적으로는 헛소리 같다. 그리고 그 내면을 따져보면 젊은 사람들 앞에서 그저 잘난 척 하려고 하는게 너무도 눈에 보인다.

 

이미 말했듯이 공감에 대한 이해가 없는 논리와 이성을 기반으로 해서 나오는 조언들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오히려 반발만 생기고 스스로 꼰대임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 그렇다고 해서 젊은 세대가 무조건 잘한 것은 아니다. 원래 삶은 불만이나 불평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가능하다면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삶은 원래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본인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다른 그 누군가가 아니다. 내 입에 들어가는 먹을 것이고, 내가 누리는 행복이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고 싶으면 자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당장 눈 앞의 즐거움, 당장 사고 싶은 것들을 사는 것, 놀러 가고 싶은 욕구 등을 제어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눈 앞의 행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무의식에서 발생하는 지루함을 '시간 때우기 식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당장 행복하긴 하다.

 

하지만 지루함이 느껴지는 진정한 이유, 즉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해결되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지루함이 느껴지는 순간마다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시간 때우는 행복' 에 집착을 하게 된다.

 

본인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주변에서 끝없이 밖으로 불러 낼 것이며, 본인이 그러고 싶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SNS를 보다가 보면 자신만 행복하지 않는 듯 생각될 것이며, 본인이 그러고 싶지 않아도 결국 우울해질 것이다.

 

지루함은 원래 정도가 약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마치 천천히 끓는 물에 들어가 있는 개구리와 같이 반응한다. 갑자기 뜨거운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공포에 질려서 펄쩍 뛰어서 도망가지만, 찬물에서부터 천천히 뜨거워지고 있는 물에 들어가 있는 개구리는 죽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익어 죽는다.

 

아마도 죽은 개구리는 순간 순간마다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펄쩍 뛰어서 달아날 만큼 크게 두렵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거기에 중독되면 죽는 줄도 모르고 물의 따뜻함을 즐기게 된다.

 

사실 젊은 세대가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기성 세대의 교육 방법 때문이다그로 인해서 삶에 대한 주체성이 많이 부족하다. ,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너무 배우지 못했다.

 

,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도록 키웠어야 했는데, 너무나 많은 강요와 지시로 키웠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그런 시스템의 문제에 일찌감치 눈을 뜬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가 깜짝 놀랄 정도로 확실한 주체성이 보여주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아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놀게 하고, 스스로 공부하게 했어야 했는데, 거의 모든 것이 다 이미 부모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젊은 세대가 스스로 삶의 주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확률이다. 사람은 원래 남들이 사는 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수의 그런 젊은이들을 보고, 젊은 세대가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의식이 뚜렷하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삶의 주체성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가장 흔한 태도가 바로 책임감 부족이다. , 자신에게 일어난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책임지기 보다는, 누군가를 탓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것에 매우 익숙하다. 자신의 삶인데도 그렇다. 자신에게 일어난 좋지 않은 일들을 외부의 탓을 하면서 끝낸다.

 

물론 현재의 사회는 그런 그들에게 충분히 비난을 받을만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그러니 어떤 젊은이가 불평, 불만을 갖지 않겠는가? 누가 이런 환경에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결국 이것은 자기 손해이다. 취직이 안 된다고 사회 탓을 하는 것은 이해해 줄 수 있으나, 취직이 안되면 본인만 손해이다.

 

도대체 이 세대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여기에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

 

일단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은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특히 이미 꼰대가 된 사람들의 생각은 도저히 바꿀 수 없다. 이미 그런 그들의 생각들이 본인들의 정체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그것은 문제이긴 하다. 꼰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성장이 멈췄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삶의 성장이 멈춘 사람들은 점점 더 고집스러워지고 점점 더 딱딱해질 뿐이다. , 고약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육체적인 성장은 20대 초면 끝난다. 하지만 내면의 성장은 평생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그 존재의 육체성에 있지 않다. 물론 육체는 매우 중요하다. 내면만큼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육체는 한계가 명확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20대 육체의 성장이 멈춘 후, 죽을 때까지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나 중요한 내면의 성장이 완전히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상 퇴보가 된다.

 

그래서 그냥 고집스러운 늙은이가 된다. 원래 늙음은 현명함의 상징이어야 한다. 지혜로와져야 하는 것이다. 지식과 경험이 쌓이기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깊은 사고의 경험을 통해서 융합이 되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래서 정말로 소수의 사람들만 어르신이 되고 있다. 대부분은 그저 노인네가 될 뿐이다.

 

그래서 그나마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젊은이들에게 있다. 왜냐하면 아직은 덜 딱딱하고 덜 고집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나중에 그들이 비난했던 노인들이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아주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렇게 변하게 되어 있다. 평생 동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살아야 겨우 지켜낼 수 있는 부드러움이다. 그리고 관대함이다.

 

젊은 세대의 태도를 바꾸고 싶다면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 젊은 세대가 더 이상 밖에다 핑계를 댈 수 없도록 해줘야 한다.

 

사회는 더욱 더 공정하게 바뀌어야 하고, 경제적 신분 변화는 좀 더 유연해져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차별이기 때문에 그렇다. 쉽게 말해서 차별만 당하지 않아도 세상의 많은 분노가 사라진다.

 

홍길동도 서자로 태어나서 결국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회의 공정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그나마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차별은, 타고난 것에 의한 차별이다.

 

외모, 지능 등등, 이런 것을 서로 차이가 많이 나도 질투나 하고 말지,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능력을 가졌는데, 그것을 활용할 기회 자체가 서로 다르게 주어진다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된다. 살인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기회가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이것이 이성과 논리로 젊은이들에게 꼰대질 하고 있는 기성 세대들이 해야 할 진짜 일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젊은 세대에게 정말로 미안해 해야 할 일이다. 그 기성 세대가 바로 현재의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득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다음 세대의 삶을 시작부터 흔들어 버리고 말았다. 아주 작은 욕심 하나 하나가 모여서 이런 불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것에 모두 일조를 했다.

 

기성 세대들 중에서 과연 누가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까?

 

물론 그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오늘도 꼰대질을 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성찰의 부족으로 인해 모르는 것은 그나마 이해해 줄 수 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모르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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