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넘어, 나를 찾다

13. 사람의 감정 - 2부

아이루다 2017. 6. 8. 06:58


[1부에서 계속]


, 지금까지 설명했던 내용을 좀 더 정리 해보죠.

 

사람의 무의식은 감정을 이용해서 의식을 조종해요. , 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가장 좋은 감정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요.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우리는 매일 좋은 감정을 얻기 위해서, 즉 행복하기 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 방법, 이론을 다 동원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 과정이 삶이죠.

 

그리고 이때는 바로 이성이 등장해요. 행동대장이죠. 그러다 보니 우리는 우리들의 본질이 바로 이성이 속해 있는 의식적 영역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의식은 무의식의 집사에요. 주인은 무의식이고 집사인 의식은 주인의 의도를 최대한 맞춰주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뿐이죠. 주인은 어둠 속에서 집사가 해온 결과를 판단만 해요.

 


하지만 여기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집사인 의식은 주인인 무의식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점이에요. 

 

무의식은 의식가 달리 대화를 할 줄 몰라요. 그리고 그저 모든 것을 감정으로만 표현해요. 이것은 마치 눈만 꿈뻑거릴 줄 아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과 비슷해요. 뭐든지 먼저 알아서 물어봐야 하죠. 그리고 상대는 거기에 대해서 눈을 깜빡이는 횟수로 대답만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의식은 자주 오해를 해요. 무의식이 원하는 것인 줄 알고 했는데, 하고나니 원하지 않는 것을 알게 돼요. 혹은 무의식이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우연히 해보니 좋아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그렇게 많은 실수를 하고, 시행착오를 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이유가 돼요.


사람이 불안정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고요. 정말로 자신이, 즉 무의식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자신도 잘 모르거든요.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자신도 잘 몰라요. 그래서 혼란스럽고 엉뚱한 행동을 해요. 이성적으로 아주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했지만, 그 결과는 엉뚱해요.

 

5년간 돈을 모아서 떠난 해외 여행보다 그냥 오랜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떠는 것이 더 즐거워요. 아주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은 고기 요리보다 집에서 양푼에 비벼 먹은 밥이 더 맛있어요. 그러니 무척 헷갈려요.

 

그럼에도 의식은 여전히 해외 여행이, 비싼 요리가 더 행복할거라고 판단해요.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긴 하죠. 하지만 행복할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해서 행복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런 의식과 무의식의 연관 관계를 정말로 깊게 이해해야 해요. 이것을 이해할 때,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진짜 욕구를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이룰 수 있어요. 그러면 무의식은 행복이라는 감정을 보상으로 지불해요.

 

일반적으로 집의 주인은 돈을 이용해서 집사를 부려먹죠. 그렇다면 무의식은 무엇을 통해서 의식을 부려먹을까요?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에요.

 

, 무의식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통제함으로써 의식을 자기 마음껏 부려 먹어요. 그래서 집에서 쉬고 싶은데도 힘들게 밖으로 일하러 나가게 만들어요. 놀면 굶어 죽는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어서 그것보다는 덜 힘든 비 오는 날에 가기 싫은 회사에 출근을 하게 만들죠.

 

이것은 일종의 채찍이에요. 혼내서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이 오직 채찍만 쓰지는 않아요. 당근도 쓰는 현명함도 가지고 있죠.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감정들, 즉 '행복' 이에요. 무의식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의식에게 포상을 줌으로써 의식이 일하도록 만들어요.


그래서 인간의 감정은 크게 두려움과 재미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둘 중에서는 두려움이 더 본질적이에요.

 

이 정도까지 인간의 정신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사람이란 존재가, 나 자신이란 존재가 도대체 어떤 원리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 한가지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느끼는 수 많은 나쁜 감정들은 바로 무의식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받는 벌이라는 것이죠.

 

무의식은 어떤 회사에 취직을 원해요. 그러면 의식은 그 회사가 좋은 점을 찾아내요. 하지만 결국 그 회사에 취직을 못하면 무의식은 벌을 내려요. 그러면 당신은 좌절감을 느껴요.

 

무의식은 저 남자나 저 여자와 사귈 것을 원했는데,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실망이나 낙담이라는 큰 벌을 내려요. 그래서 의식은 고통스러워해요. 심지어 자살까지도 할 수 있어요.

 

가져야 할 것을 갖지 못한 채 살면 무의식은 불안함을 느끼게 해요, 그러다가 가진 사람을 보면 질투심이나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어요. 그러면 의식은 상처를 받죠.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어떤 일을 당하게 되면 무의식은 분노라는 감정을 만들어내요. 생명의 위협은 무의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더욱 더 크게 화를 내가 만들어요.

 

그로 인해서 분노의 감정은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강렬하답니다. 그리고 참기도 힘들고요. 그러니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좀 있어요. 슬픔 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은 없어도 분노 조절 장애는 있는 것이죠.

 

여기까지 이해하시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에요. 물론 이 설명이 모두 다 맞는 것은 아니겠죠. 단지 대략 이런 원리로 무의식과 의식이 상호 연관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사실만 이해하시면 돼요.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하나 나와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나쁜 감정들을 느끼기 싫다고 해서, 그 감정들을 느끼지 않을 방법은 결코 없다는 것이죠.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 것은 모두 의식을 교육시키는 행위에요. 그래서 그런 것들은 그저 의식적에만 영향을 끼쳐요. 그리고 정작 바뀌어야 하는 무의식은 전혀 듣지 않죠. 무의식은 마치 아이처럼 굴어요. 그냥 하고 싶다면 해야 해요. 그래서 설득이 안돼요.

 

결국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화를 내지 않고 싶어도 화가 나고, 슬프지 않고 싶어도 슬프고, 질투를 느끼지 않고 싶어도 느끼고, 혐오를 느끼지 않고 싶어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지만 느끼게 되는 것이죠.

 

의식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않고 싶다는 말은, 의식이 무의식을 조절하겠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시도죠.


이것은 행복과 불행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겠다는 말과 똑같아요.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누가 불행하겠어요.

 

단지 당신은 의식적으로 감정 자체를 덜 느끼게 훈련할 수 있어요. , 각자가 가진 감정의 그릇의 크기를 조절은 할 수 있어요. 감정을 덜 느끼게 열심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돼요.

 


그러면 분명히 덜 두렵고, 덜 슬프고, 덜 화가 나요.  그런데 그러면 좋을 것 같나요?

 

생각보다 별로 아니에요. 감정을 느끼는 자체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바로 나쁜 감정도 덜 느끼지만, 좋은 감정들도 잘 못 느낀다는 점이에요. , 불행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안 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에 비해서 더 많이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훈련을 받아요. 딱히 어디 학원에 가서 받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가 보면 그래요.

 

어른들은 남자 아이가 울면, 남자가 그런 일로 울면 안되다고 해요. 여자 아이가 울면 그냥 안아주죠. 남자와 여자는 어려서부터 이런 식으로 차이가 나게 대접을 받기 때문에, 성인이 된 남자들은 보통 감정 자체가 많이 무뎌져 있어요.

 

그래서 남자들이 평균적으로 여자에 비해서 이성적이긴 하죠. 하지만 앞에서 말한 문제가 있어요. 남자들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매우 한정적이란 점이에요. 물론 남자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이와 달리 여자들은 감정을 억지로 제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감정적이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과 결혼을 하고는 여자의 행복에 기대게 되죠.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부부의 형태에요.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여자가 이성적이고 남자가 감정적인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 만약 당신이 나쁜 감정들을 많이 느껴서 그것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써야 해요.

 

그 중 하나가 이미 설명한 것처럼 감정 자체를 무디게 만드는 방법이에요. 또 다른 하나는 알고 나면 좀 허무한데, 이 방법이 첫 번째 방법에 비해서는 훨씬 더 좋아요.


그것은 바로 방법은 바로 가능하면 많이 행복해지는 것이에요.

 

질투심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질투를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행복해지세요.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행복해지세요. 슬프지 않고 싶다면 행복해지세요. 화를 자주 내고 싶지 않다면 행복해지세요.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행복해지세요.

 

당신이 어떤 나쁜 감정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단 하나의 사실만을 의미할 뿐이에요.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죠. 당신이 행복하면 할수록 당신이 경험하는 많은 나쁜 일들은 그냥 금세 사라지고 말아요.

 

기분이 너무도 좋은 날엔 터무니 없는 바가지를 써도 그냥 넘어가요. 그러니 결혼식장이나 피서지 같은 곳에서 그렇게 바가지를 씌우죠.

 

심지어 너무나도 행복하면 오늘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인 죽음까지도 극복이 된다는 뜻이에요. 매우 놀랍죠.

 

그러니 괜히 엉뚱하게 나쁜 감정 하나 하나를 느끼지 않으려고 헛된 노력을 하지 마세요.

 

질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하거나, 열등감을 극복하거나, 화를 잘 안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결코 이뤄질 수 없어요.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설령 어느 정도 되더라도 그것은 감정 자체를 줄여버리는 일이니 결국 원하던 행복은 얻기 힘들어져요.

 

마지막으로 꼭 하나 더 알려드릴게 있어요.

 

지난 글들에서 저는 당신의 문제를 자기 합리화가 아닌 용서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었어요. 그런데 그 이유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시 설명 드릴게요.

 

자기 합리화는 기본적으로 의식적 영역이에요. , 이성의 영역이죠. 아무리 자기 합리화이긴 해도, 거기엔 나름대로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해요. 즉, 이성에 의한 논리와 합리의 영역이죠. 그래서 자기 합리화를 할 때는 의식만 설득이 되죠.

 

하지만 조금 더 생각을 해보죠. 당신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면 정말로 무엇이 문제일까요? 아니 처음부터 그것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당신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바로 감정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쁜 감정이 들면, 그때부터 그 일은 문제가 돼요. 즉, 어떤 일이 문제가 된다는 의미는 무의식이 그것을 문제라고 판단한 결과에요. 그러니 나쁜 감정 상태에 놓여요.

 

예를 들어서 당신이 만약 내일 죽을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죠. 그런데 오늘 당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 이 문제는 얼마나 심각할까요? 내일 죽은 사람에게는 암조차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의 영역이 아니에요.

 

그런데 당신은 이것을 자기 합리화를 통해 의식적 영역에서 이성에 의한 논리로써 해결하려고 했어요. , 무의식이 문제인데 의식을 설득한 것이죠.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원래부터 안 되는 일이에요. 물론 의식은 쉽게 속아요. 몇 가지 필요한 근거만 가져오면 금세 넘어가죠.

 

한 여자가 회사에서 크게 실수를 해서 상사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 친구를 만나 자신의 실수가 어쩔 수 없었음을 하소연해요. 그러면 친구는 위로를 하죠. 그리고 그 실수를 만들게 한 다른 원인들, 즉 상사가 업무 지시를 불명확하게 했거나, 다른 팀에서 필요한 자료가 너무 늦게 왔거나, 어제 밤 늦게 남자친구가 전화를 해서 잠을 잘 못잔 이유까지 모두를 참고해서 당신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줘요.


그러면 의식은 금세 자신이 한 실수를 합리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무의식은 전혀 설득되지 않았죠. 자신이 한 큰 실수가 결국 언젠가 자신에게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무의식은 알고 있거든요. 연봉 협상을 할 때나 혹은 회사가 어려울 때 그만둬야 하는 일순위가 될 수 있다는 점까지도요. 이런 식으로 실수를 했을 때 느꼈던 철렁하는 감정은 여전히 당신의 무의식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죠.

 

이런 식의 경험이 자꾸 쌓여서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당신의 잠재적 불안감을 커지게 돼요. 하지만 의식은 자꾸 그것을 합리화 했으니, 왜 불안감을 느끼는지 스스로 파악하기가 힘들어져요. 그로 인해 그 이유도 모른 채 불안, 초조, 우울, 짜증, 분노와 같은 감정에 훨씬 더 자주 노출되게 돼요. 한 마디로 불행하게 되죠. 피해의식이 커지고 방어적으로 살게 돼요.


그래서 그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해야 해요. 하나는 상사에게 이후에 충분히 인정받을만한 일을 해내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끝이 없죠. 그래서 이런 삶을 사는 것은 매우 피곤해요. 인정은 받을지 모르지만, 행복하긴 힘들어요.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면 두 번째 방법을 써야 하죠.

 

두 번째 방법은 능력이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자신이 일을 잘하지는 못하니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이 둘 중 하나는 해야 무의식이 가진 불안감이 해소가 될 수 있어요.

 

그래요. 이 두 번째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고 당신에게 적용 가능한 방법이에요. 그것을 통해 무의식을 변화시켜야 해요. , 감정을 바꿔야 해요.

 


그리고 그 방법이 바로 또 다른 감정을 이용하는 방법이죠. 그 감정이 바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즉 '용서' 라는 감정이에요. 자신이 가여워 흐르는 눈물같은 감정 말이에요.

 

용서는 결코 이성적 행위가 아니에요. 물론 용서를 하기 까지는 많은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해요. 하지만 용서는 결국 감정적 변화죠. 용서는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변화되는 감정이죠. 아무리 이성적으로 옳아도 용서를 할 수 없을 때는 할 수 없어요. 사람이 미운 것을 조절할 수는 없죠.

 

진정한 용서는 꾸밀 수 없어요. 감정 자체가 온통 그렇게 변화가 되어야만 가능하죠. 진짜로 용서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당신 마음 속에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의 흐름이 나타날 것이고, 그 흐름은 당신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그 응어리를 단번에 파괴시키고 말 것이에요.

 

그래서 용서를 하고 나면 아주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한 기분을 느껴요. 그리고 그것을 왜 진작에 내려 놓지 못했을까 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해요. 왜냐고요? 감정이 원래 그래요. 아무리 힘들었던 감정도 좋은 감정으로 대체가 되면 금세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아요.

 

그러니 당신이 겪은 어떤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감정을 움직여야 하고, 감정을 움직이고 싶다면 용서를 통해서 해야 해요.

 

아주 당연한 것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자기 용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에요.


그나마 당신은 상처를 자책으로 감당해왔기에, 용서라는 과정을 통해 자기 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이에요. 당신은 자기 합리화를 통해 그것들을 쉽게 넘기지 않았기에 다행이죠. 비록 힘든 과정이지만, 당신에겐 희망이 있어요.

  

처음엔 문제가 생겼고, 그 다음엔 상처를 받았으며, 그 후로 자책을 했죠. 이제는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러면 다음은 뭘까요?


이젠 행복해져야죠. 진짜 목표를 이뤄야죠. 지금부터 그것을 향해 나가 봐요.

 

 


'서른을 넘어, 나를 찾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 행복의 종류  (0) 2017.06.10
14. 행복의 정체  (0) 2017.06.09
12. 사람의 감정 - 1부  (0) 2017.06.07
11. 불완전한 나  (0) 2017.06.06
10. 나를 용서하기  (0) 2017.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