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두려움의 관계, 행복의 관계

아이루다 2016. 11. 23. 17:36


사람들은 수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각각의 관계들은 저마다 어떤 고유한 목적들이 있다. 그것들은 이득, 정보, 필요성, 효율, 협업, 보호, 재미, 공감, 공유, 가치, 의미 등등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떤 관계가 오직 하나만의 목적만을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관계들은 서로 얽힌 복잡한 형태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각 관계는 주 목적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형태의 목적들을 크게 두 가지로 형태로 나눠보면, 각각 두려움을 대비하는 목적과 행복함을 위한 목적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목적은 각각 만족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동시에 만족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관계는 이 둘 중 한쪽만 만족되는 편이 대부분이다. 이 둘이 동시에 모두 만족되는 관계가 한쪽만 만족되는 관계보다는 훨씬 더 좋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통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대부분 하나만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이런 관계의 특징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상 관계로 인해 벌어지는 수 많은 문제점의 기저 원인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잘 인식하지 못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관계라는 것이 일단 이성적인 판단 하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의 큰 목적, 즉 두려움과 행복은 모두 감정과 관련된 영역이다. 그리고 감정은 무의식 중에 발생하기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기는 몹시 힘들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사람을 사귀거나 마음에 든다고 해서 어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그런 관계를 관계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저 아는 사람 수준일 뿐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제대로 이해해야 할 점은,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맺는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수의 불행함이 바로 관계가 두 가지 목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매일 대면하고 있는 수 많은 관계에서 왜 그렇게 복잡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두려움을 대비해서 맺은 관계가 행복하지 않을 경우 그것에 대해서 계속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거나 혹은 행복을 위해 맺은 관계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상대에게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관계의 목적을 벗어난 기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하게 된다.


성실하고 믿을만 하며 든든하지만 재미가 없는 사람와의 관계를 유지할 지 고민하는 경우나 만나면 늘 즐겁고 행복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큰 힘듦이 찾아 왔을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실망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의 예가 될 것이다.

 

관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인간을 관계로 시작해서 관계로 끝나는 존재라고 정의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하다면 관계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하는 편이 좋다. 그래야 관계에서의 혼란스러움이나 혹은 실수 그리고 어리석은 행동을 멈출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두려움을 위한 관계와 행복함을 위한 관계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 둘을 제대로 분리해서 봄으로써 새로운 시점에서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기본적으로 관계에서 가장 좋은 형태는 이 두 가지 목적이 동일하게 충족되는 관계이다. 즉, 두려움을 위해서도 행복함을 위해서도 필요한 관계야 말로 무엇보다도 최고의 관계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면 대부분 행복을 위한 관계들뿐임을 알게 된다. 사실 두려움을 대비하기 위한 관계는 생각보다 매우 적다.

 

그래서 우리는 다수의 행복을 위한 관계와 소수의 두려움을 대비하기 위한 관계를 맺는다. 보통 전자를 지인, 친구 등으로 칭하고 후자를 가족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통계적으로 그렇다. 어떤 경우엔 지인이나 친구가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기도 하고 가족이 친구보다도 못한 경우도 꽤나 된다.

 

아무튼 그들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대비하기 위해서 맺은 관계들이 행복을 위해 맺은 관계보다 훨씬 더 가깝다. 소수의 깊은 관계와 다수의 가벼운 관계인 셈이다.

 

우리가 이러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깊은 관계일수록 그 무게를 같이 감당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흔들림을 대비해서 관계를 맺어 놓았으나 결국 상대의 흔들림에도 같이 감당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관계가 온전히 유지가 된다. 우리는 한쪽만의 두려움에 대비해서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나마 있자면 가장 밀접한 관계 중 하나인 부모와의 관계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명확하다.


그러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 삶이 너무 불명확 해진다. 이것은 사실상 물리적 한계점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의 숫자를 마음대로 늘릴 수 없다. 시간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관계를 두려움과 행복이란 두 가지 목적으로 나눠서 맺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두려움을 위한 관계와 행복을 위한 관계가 분리될 때 나타나는 가진 문제점은 사춘기 시절 아이들의 모습에서 자주 발견된다. 당시 아이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끝없이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다. 마치 친구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기도 한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정작 그들을 보살펴 주고, 용돈을 주고, 밥을 먹여주는 부모들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적대적으로 된다는 점이다.

 

이때 부모는 두려움을 위해 필요한 관계이고 친구는 행복을 위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부모는 보통 아이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 한다. 하지만 아이는 어떨 때는 그것을 귀찮아 하고 자신을 구속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때로 부모는 아이의 그런 태도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많은 것을 희생하고, 많은 것을 해줬는데 아이는 부모에게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좋은 말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하긴 하지만, 같은 상황이라면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감사할 줄 아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그렇지 못한 부모보다 훨씬 더 행복할 수 밖에 없다. 단지 부모는 이미 혈연으로 맺어져서 끊고 맺기가 불가능한 관계이기에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점은 아이가 나이를 먹으면 그런 부모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아이의 친구들은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다. 아이의 친구들을 보살펴주거나, 돈을 주거나, 밥을 해주지는 않지만, 아이를 행복하게 해준다. 아이는 친구들과의 경쟁과 공감 등을 통해서 큰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어릴 때에 친구가 부모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가 나이를 먹게 되면서 결국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삶이 늘 행복한 상황에만 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경쟁에 내몰리고, 사회에 진출하여 맺고 싶지 않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그래서 삶이 힘들다고 느낀다. 그리고 몇 번의 배신도 경험하게 된다. 사실 관계를 맺다가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는 아주 흔한 경험 중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누군가 관계를 맺는 사람과의 거리를 조정하려고 하게 된다. 즉, 즐거움이나 행복을 공유하는 관계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행복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맞물려 있다.

 

배신이나 실망의 경험과 행복하고 싶다는 욕구가 합쳐지면,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오직 행복만을 추구하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불행해지지만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은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행복 하려고 맺은 관계들은 딱 거기까지만 유효하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어려움 속에 놓이게 되면 그때는 행복 하려고 맺은 관계들은 자연스럽게 끊겨 버린다. 그리고 마약 이때 두려움을 대비해 놓은 관계가 따로 없을 경우 우리는 커다란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설령 그 두려움의 경험이 지나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삶이 두려워진다.

 

더군다나 우리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행복의 경험보다는 점점 두려움의 경험을 더 하게 된다. 몸도 아프고, 자연스럽게 경쟁에서도 뒤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다수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두려움의 경험을 하게 될 때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바로 가족과 같은 깊은 관계이다. 가족은 마지막까지 남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이다. 만약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이렇게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가족이라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가족간의 관계가 두려움을 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행복할 수도 있다면 어떨까? 즉, 두려움과 행복의 목적이 모두 한꺼번에 만족될 수 있다면 어떨까?

 

이것이 최상의 관계가 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둘이 한꺼번에 만족되는 관계를 맺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보통은 이것을 별도로 맺는다.

 

두려움을 대비하는 깊은 관계는 보통 특별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더해서 진지하고 무겁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임이 뒤 따른다. 즉, 우리가 힘들 때 누군가 우리를 돕는다는 말은, 그 사람들이 힘들 때 우리도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진지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가족 관계를 통해서 행복하기 힘든 이유도 바로 이런 면 때문에 그렇다. 형제끼리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부모를 공동 부양해야 하거나, 아픈 부모를 모셔야 할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는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유산 등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깊은 관계는 책임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단점들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과 행복한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행복을 위한 관계는 따로 외부에서 맺게 된다.

 

행복을 위한 관계는 상대적으로 훨씬 가볍고 재미가 있다. 더해서 책임감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런 관계에 더 잘 끌린다. 우리들의 이런 성향은 요즘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훨씬 더 심해졌다. 우리는 이제 직접 만나는 수고스러움 까지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더 빠르고, 더 비용이 들지 않으며, 더 다양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문제는 이제 예전의 친구들 수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책임조차도 기대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온라인 메시지로 축하를 하고, 문자로 슬픔을 애도해주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래서 쉽긴 하다. 어렵게 선물을 사고, 복잡하게 만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계속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꽤나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늘 그렇게 살 수만은 없으며 더해서 우리는 매년 조금씩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바로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육체적 노화를 의미한다. 더해서 우리는 점점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한다. 그래서 결국 경쟁에서 탈락하게 된다. 우리는 점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쳐다보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사람들이 되어 간다.

 

이것이 바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의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 가는 두려움에 대비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평생을 행복을 위한 관계 맺기에만 집착하고 살았다면 어떻게 될까?

 

행복하기에 만 집착하고 살아온 사람은 조금이라도 행복하지 않는 상황에 놓이면 그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불행하다 싶으면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행복하지 않는 세상을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훈련이다. 불행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내성이 생긴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어느 수준까지는 잘 견뎌낸다. 또한 불행이 가진 심각한 문제점을 잘 알기에 평소에 행복을 위한 관계 맺기보다는 두려움에 대비하는 관계 맺기에 더 신경을 쓴다.

 

그래서 결국 나름대로 선방하면서 삶을 마감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이 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답은 각자마다 천차만별이다. 단지 현재 어느 순간에 자신의 인간 관계에 대한 많은 문제점을 느꼈거나 혹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부터 관계의 두 가지 목적을 분리해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말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너무 두려움만을 대비하고 살아서는 삶이 끝없이 춤을 출 것이고, 너무 행복만을 추구하고 살게 되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그것에 대한 불안함이 흘러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장 힘들 때, 한 명 정도는 옆에서 지켜줄 사람을 만드는 것이 좋다. 그 사람이 남편이나 아내이든, 자식이든, 진실한 친구이든 간에 상관없이 필요하다.

 

평생을 계속 행복함을 위한 관계만을 맺으려고 노력하다가는 결국 쓸쓸하고 외로운 노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후회가 없다면 상관은 없다. 삶을 어차피 한 번이니 후회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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