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지적 능력에 숨겨진 힘

아이루다 2016. 11. 4. 05:50

 

인간은 크게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는 신체적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 능력이다. 그리고 이 둘이 조화가 되면서 성격이 형성되고, 그럼으로써 성격적 능력과 기타 다양한 형태의 능력들이 발현된다.

 

신체적 능력은 속도, 힘, 정교함 등등을 기준으로 해서 아주 다양한 형태로 세분화 되는데, 아무튼 오늘 다룰 내용은 아니니 이쯤에서 넘어가자. 그리고 오늘은 지적 능력, 즉 지능에 대해서 집중을 해보도록 하자.

 

지적 능력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공부' 이다. 즉, 우리는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지능을 판단하곤 한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것을 측정하기 위한 아이큐라는 수치도 있다.

 

실제로 아이큐가 높은 사람이 머리가 좋을 확률이 높고 공부를 잘 할 가능성도 높다. 여기까지는 매우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러면 지적 능력은 공부 말고 또 다른 영역에서 역할을 하는 경우는 없을까? 당연히 있다. 그것은 지적 능력을 통해 가능해지는 이해력이란 측면에서 바라볼 때 드러난다.

 

우리는 보통 지능을 암기력과 이해력, 두 가지 측면에서 보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 둘 중 하나만 잘해도 어느 정도 똑똑해 보인다. 즉, 암기를 잘하거나 이해력이 뛰어나면 똑똑해 보인다. 물론 둘 모두 잘해야 제대로 똑똑한 것은 맞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암기력과 이해력은 조금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물론 암기력은 아주 중요한 능력이긴 하다. 그렇지만 암기력은 암기력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마치 백과 사전과 같다. 백과 사전은 많은 개념들을 정리해 놓은 책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어떤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암기력은 이해력이 동반될 때 진정한 힘을 갖는다. 즉, 암기력은 이해력에게 종속된다. 그래서 사실상 지적 능력이라고 말할 때, 그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해력을 뜻한다.

 

더군다나 이해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지적 능력은 공부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해력을 너무 학문적 영역으로 한정하려고 한다.

 

지적 능력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에서 가장 흔한 예는 어떤 일을 해내는 능력이다. 사실 이것은 공부를 하는 능력과 어느 정도 일치되면서도 되지 않는데, 공부에서는 암기력이 매우 중요한 반면, 일을 할 때는 암기력의 중요성은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닌 경우가 흔히 나타난다. 즉, 암기를 잘하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일은 단지 회사에서 하는 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청소나 빨래와 같은 집안일도 해당된다. 은행을 보는 일과 같이 살면서 해야 하는 많은 단순하고도 반복적인 일까지도 포함한다.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일처리를 잘한다.

 

이것은 공부의 범위를 벗어난 지적 능력에서는 암기력보다는 이해력이 훨씬 더 중요해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실 공부조차도 어려워질수록 점점 더 암기력보다는 이해력이 중요해진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력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공감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하면 지적 능력이 좋은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고, 똑똑한 사람들은 보통 감정적이기 보다는 이성적이라서 공감이란 말과는 조금 멀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즉, 똑똑한 사람들은 좀 냉정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공감이란 말이 가진 두 가지 의미를 뒤섞어 해석해서 나오는 오해이다. 공감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이뤄지는데, 하나는 거울처럼 복사되는 공감이 있고, 다른 하나는 깊은 이해를 통한 공감이 있다.

 

아이가 어른의 표정을 보고 따라서 울거나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거울 공감이다. 이것은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 역시도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상대의 처지를 잘 몰라도, 상대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느냐 만 가지고도 공감을 해 준다.

 

같이 울어주고, 같이 웃어준다. 심지어 아무것도 몰라도 주변에서 웃으면 같이 따라서 웃는다.

 

이 능력 덕에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공감을 경험할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다 말하지 않아도 또한 자신의 처지를 주변에서 다 이해해주지 못해도 표정으로는 충분히 공감해준다. 물론 이런 류의 공감은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혀진다. 그래서 리액션이라고도 한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누군가의 공감을 필요로 할 때조차도 그것이 일시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당시 어떤 일로 속상할 때, 그것을 잠시만 공감해주는 사람만 있어도 견딜만하다. 사실 어떨 때는 그것을 계속 기억해주는 사람이 더 부담스럽기도 하다. 자신은 이미 흘려 보낸 감정인데, 상대가 그것을 계속 기억하고 물어보면 곤란하기도 하고, 괜히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좋았던 기분이 상하기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래된 경험을 통해서 각자 갖게 된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깊은 공감이 사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짜 공감이다. 그런데 이 깊은 공감을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에 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즉, 어떤 일로 슬퍼하고 있다면 그 슬픔의 배경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더해서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공감에 있어서 지적 능력이 필요한 이유가 된다. 적은 정보를 통해서 더 많은 숨겨진 것들을 유추해낼 수 있는 능력, 이것을 위해서는 지적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 된다.

 

물론 많이 친한 사람일수록 우리는 더 많이 알기에 지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해줄 수 있다. 마치 가정 주부가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요리에 능숙해진 것처럼 무엇인가를 자주 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해력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다. 요리를 잘한다고 해서 식 재료인 상추를 잘 키우거나 닭을 잘 키우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자신이 친한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과 인간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얘기란 뜻이다.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쓴 글이나 책 그리고 만든 영화를 보면서 받는 위로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만들어지는 창작물들은 우리에게 조금 다른 형태의 위로를 준다. 모르는 사람에게 받는 공감인 셈이다.

 

이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친하고 아무리 자주 본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공감이 되지 않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또 다른 누군가를 원하게 된다. 보통 가족과 친구는 누구보다도 거울 공감을 잘해주는 사람들이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다. 우리는 자신을 깊이 공감 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없을 때 자신이 외롭다고 생각한다.

 

지적 능력이 영향을 미치는 세 번째 분야는 통찰력이다.

 

사실 통찰력은 지적 능력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지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또한 정말로 중요한 능력이다. 예를 들어서 인간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고 또한 이해력도 좋은 인공 지능 로봇이 나오더라도 통찰력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한 동안 인간이 우세할 듯싶다.

 

즉, 통찰력은 인간의 복합적 사고의 최정상에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지적 능력이 정말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통찰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다. 거기엔 지적 능력 이외에도 정말로 많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통찰력을 가질 수는 없지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사실 세상은 아주 복잡하게 돌아가는 듯 하지만, 생각보다 아주 단순한 몇 가지 원리로 인해서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이 물리적 세계가 이렇게나 복잡하지만 결국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이라는 네 가지 힘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몇 가지 원리적 힘을 꿰뚫어 봄으로써 세상을 원론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통찰력이다. 물론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육아를 잘하거나 각종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식물의 광합성 원리를 안다고 해서 옥수수를 잘 키우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통찰력의 가치를 제대로 모른다. 이론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에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느낀다. 물론 이 말도 어느 정도는 맞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한 가지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 셈이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 의문점,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학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적 능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인간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지적 능력을 너무 좁은 범위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람과 잘 지내는 것도 지적 능력이 큰 영향을 미친다. 물론 단순히 성격이 착해서 사람들과 잘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자주 손해를 보고 상처도 많이 입는다.

 

우리는 지적 능력을 간과함으로써 많은 오해를 하기도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판단을 하는 것은 단지 나이 탓이 아니다. 정보를 접할 기회와 혹시라도 접했더라도 그것을 판단해내는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이상한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왜 자신을 잘 이해해주지 못할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은 왜 남을 잘 이해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것 역시도 모두 지적 능력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니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공부를 못한다고 고민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타고 났다면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적 능력은 어느 정도 개발이 된다. 물론 한계는 있지만 노력 여부에 따라서 많이 나아질 수 있다. 특히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책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고 범위를 확장시켜 줄 수 있는 모든 경험이 바로 지적 능력을 향상시켜줄 수 있다. 글을 쓰거나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은 것 중 하나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말고 자신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것이 느리지만 확실하다. 더군다나 그것 이외에도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러니 시도해볼 만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