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를 위해서 나쁜 감정들 없애기

아이루다 2016. 10. 15. 10:27


한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던 사부가 악당의 암수로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남자는 복수를 결심한다. 하지만 악당은 뛰어난 고수이다. 그래서 그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까지 이별을 고한 후, 고수가 되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20년간 무술을 익힌다. 그리고 나와서 멋지게 복수를 한다.

 

예전에 중국 무술 영화의 흔한 주제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영화들의 뒷 이야기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제 30대 중반이 된 주인공.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무술 밖에 없으며 예전에 사랑했던 여인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다.

 

더군다나 20년간 복수심에 불타서 자신의 모든 감정까지 지워버린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야 할까?  그는 지독한 허무함에 빠져서 술만 마시다가 결국 주정뱅이가 되어서 죽고 말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처럼 사람이 살다가 보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 또한 하나의 운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그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는 그 순간만큼은 잠시 짜릿할 수 있지만, 삶의 전체적인 시야로 보았을 때는 스스로 인생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기도 된다.

 

물론 멋진 복수도 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나온 복수가 그랬다. 하지만 대부분의 맹목적인 복수는 비록 나쁜 짓을 한 사람을 벌 줄 수는 있지만, 그 자신의 삶도 같이 망가져 버릴 뿐이다.

 

복수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형태의 나쁜 감정에 사로 잡힌다. 복수는 그런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분노, 짜증, 혐오 등의 감정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그 감정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노력은 보통 그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닌, 그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복수심이 느껴지면 복수를 하려고 하고, 화가 나면 화를 내려고 한다. 짜증이 나면 짜증을 부리고 혐오가 느껴지면 그 혐오심으로 상대를 대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잘 안되면 우리의 감정은 더욱 더 커질 뿐이다. 화는 더 큰 화를 부르고, 짜증은 더 큰 짜증을 불러온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방법을 쓴다. 해결할 수 없으니, 합리화를 한다. 자신에게 나쁜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 상대를 ‘악당’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은 선한 피해자가 된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착각과 실수는 망각되고 상대가 저지른 나쁜 짓만 남는다. 그렇게 되면 화나 짜증은 줄어들고 편안해질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보호되고 있다고 느낀다. 혹은 자신이 이성적으로 감정을 제어하고 있다고 느낀다. 사실 맞는 말이긴 하다. 보호되었고 제어되긴 했다. 문제는 그것을 위해 쓰인 도구, 즉 자기 합리화의 문제점이다. 이것이 우리를 아주 고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 합리화는 분명히 논리와 이성을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거기에 쓰인 사실이나 진실들은 모두 왜곡되어 있다. 자신의 잘못은 숨겨지고 상대의 잘못만 가지고 이뤄졌기 때문에 당연하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편협 되고 좁은 사고 체계 안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 수록 점점 자신이 나쁜 감정을 느끼는 것을 튕겨내 버리는 형태로 바뀐다. 사는 것도 힘든데, 괜한 감정 싸움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냥 안보면 그만이다.

 

나름대로 괜찮은 사고방식이다. 전형적이고 좁아진 세상에 대한 이해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조금 원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냥 인정하기엔 너무 단점이 크다. 우리는 노인이 되기보다는 어르신이 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복수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바라 봐야 한다.

 

우리가 복수를 하면 그것을 통해 자신의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이뤄지는 순간 깊은 허무함도 얻을 수 밖에 없다. 즉, 밖으로 향한 감정의 대응은 안으로도 그만큼의 상처를 입힌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화를 내면 그만큼 자신의 기분이 상한다. 분명히 감정은 외부를 향했는데 자신의 감정까지 한꺼번에 상처를 받는다. 이것이 감정의 본질이다.

 

우리는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겉으로 길게 가시를 만든다. 마치 장미꽃처럼 그렇게 한다. 그래서 장미꽃은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그럼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더해서 그것은 한 가지 더 큰 단점이 있다.

 

장미꽃의 가시는 그저 외부로 향해 있을 뿐이지만, 우리가 만든 심리적 가시는 외부로 뻗어나간 만큼 내부로도 만들어진다. 즉, 외부로 만들어진 가시가 길고 날카로울수록 내부로 만들어진 가시 역시도 길고 날카롭다.

 

우리가 그러는 원인은 하나뿐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장미꽃은 혼자 살아갈 수 있다. 장미꽃은 다른 장미꽃과의 관계를 맺거나 혹은 인간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가시를 이용해 그 통로를 모두 막아버리게 되면 당장 안전하고 보호는 받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때문에 도대체 행복하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그 길고 날카로운 가시로 남을 찌르면 그 반동으로 자신도 그만큼의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남을 비난하는 사람은 그 만큼이나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되고, 남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그만큼이나 자신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에게 짜증을 내는 사람도 역시나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비난도 하지 않고, 짜증도 내지 않고, 화도 내지 않고, 혐오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하게 맞는 말이다. 이런 종류의 감정 경험은 복수의 순간처럼 그 순간은 짜릿할 수 있지만, 결국 그 감정이 소모된 후 찾아오는 씁쓸하고 비참한 기분을 막을 수가 없다. 복수 후 찾아오는 허무함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쁜 감정을 최대한 없애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고 그르고,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부분을 다 떠나서, 행복하고 싶다면 그래야 한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면 남에게 짜증내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짜증이 나거나 화를 내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순서가 바뀌었다. 기분이 나빠지니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순서가 있다. 기분이 좋은 날엔 평소엔 짜증낼 일이나 화를 낼 일도 그냥 넘어간다. 우리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냈다면, 그날이 그런 짜증을 참거나 화를 참을 만큼 기분이 좋은 날이 아니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이 순서를 까먹는다. 화가 나서 기분이 상했다고 믿는다. 누군가 때문에 짜증이 나서 기분이 상했다고 믿는다.

 

그러니 모든 원인은 밖에서 온다고 믿는다. 그러니 원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더 길고 날카롭게 가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생각하면 그 모든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그러니 밖으로 아무리 길고 날카로운 가시를 만들어 봐야 더욱 사태가 나빠질 뿐이다. 더욱 단절되고 더욱 이해도가 떨어진다.

 

행복하고 싶다면 관대해져야 한다. 남을 위해서 관대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관대해져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남을 향해 뻗은 가시의 길이를 줄이고 덜 날카롭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덜 찔린다. 화가 나도 짜증이 나도 혐오감이 느껴져도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것이 맞기도 하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기도 하다.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행복하고 싶다면 베풀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좋다. 이것을 남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기본적으로 손해를 보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각자의 판단이다.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산다. 단지 모르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외부로 향한 나쁜 감정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이 시작된 이유를 이해하며, 행복하기 위한 비법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괜한 나쁜 감정에 사로잡혀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허무함에 빠지는 어리석은 행동을 멈출 수 있다.

 

이것이 행복한 삶에 대한 거의 유일한 방법론일 것이다. 이렇게 살지 못할 것이라면, 탁월하게 이뤄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풍족함에 의한 관대함이라고 생겨날 것이다.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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