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아의 완성

아이루다 2016. 8. 29. 08:37


 

한 사람이 산을 오른다. 그런데 그 산은 보통 산이 아니다. 해발 5천미터가 넘는, 그래서 언제나 하얀 눈이 쌓여 있는 그런 산이다. 이 사람은 일반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산을 오른다.

 

정산 부근에 다가가면 몸에서 내는 비명 소리를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다. 산소 부족, 근육통 등등 수 많은 증상이 나타나면서 몸은 제발 그만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상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면 왜 그 산을 올랐겠는가?

 

이 사람은 몸의 고통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는다. 그리고 결국 정상에 선다. 눈 앞에 장엄한 광경이 펼쳐지고, 지금까지 고통을 견뎌낸 자신의 삶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한다. 이 사람은 산을 오를 때마다 그런 변곡점을 경험한다.

 

그런데 산에 오르지 않은 우리들은 그 사람을 부럽게 바라보기도 하고, 왜 그렇게 산을 오르는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도대체 거기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은 산을 향해 갈까? 풍경이 멋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풍경 한 번 보려고 그 먼 곳까지 그렇게 힘들게 오르는 것 같지는 않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듯 하다.

 

무엇이 사람들을 산으로 이끄는 것일까?

 

산에 올랐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뭔가 색다르고 특별한 것들이 있는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 산이 '높은 산'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높아서도 안 된다.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높이가 있어야 한다. 천 미터, 2천 미터는 그것을 충족하기가 힘들다. 최소 5천 미터는 되어야 할 것 같다.

 

왜 높은 산이어야 할까?

 

높은 산은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할 때 힘듦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 힘들수록 더욱 더 얻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이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에고이다. 다른 말로 자아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아 발견’, '자아 성찰',  '자아 완성' 이란 말을 흔히 쓴다. 그리고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들을 해야 한다고 조언 듣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도대체 이 말들에는 실체가 없다. 무엇을 해야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성찰하고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인가?

 

듣기엔 좋은 말 같지만, 이 말은 마치 행복하게 살아라 라는 조언과 비슷하다. 그 말이 맞는다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니까 말이다.

 

자아는 인간의 중심점이다. 우리는 자아를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고, 정의하고, 판단하다. 더군다나 수 많은 감정을 통해 다양한 행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자아는 욕망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실현할 때 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삶은 자아에서 시작해서 자아로 끝날 만큼 중요한 존재이다.

 

그래서 자아 발견이란 말의 해석은 자신이 행복한 것을 찾는 과정이 될 것이고, 자아 성찰은 그 행복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를 살펴보는 과정이고, 자아 완성은 자신의 누리는 행복에 온전히 만족하는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이것만 봐도 자아에 대한 충고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자아는 그야말로 행복의 시작과 끝이다. 그러니 높은 산에 올라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하고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다.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멋져서 오르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오르는 이유는 그저 자신을 조금이라도 발견하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완성시키고 싶어서 그렇다.

 

이렇듯 자아는 자신이란 말로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과 일치화 되어 있다.

 

사람들마다 자신만의 높은 산이 있다. 누군가는 학문적 업적, 누군가는 금메달, 누군가는 한 회사의 대표, 누군가는 행복한 가정, 누군가는 잘 키운 자식, 누군가는 사회적 명예, 누군가는 많은 돈이다. 그것은 다양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름이 없다.

 

그리고 여기엔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이나 우리가 믿는 것과 달리 자아는 자신과 일치화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아는 경쟁의 산물이다. 즉, 우리가 가진 모든 종류의 자아는 인간의 단체 생활, 즉 사회적 삶을 통해서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가 만들어 낸 각종 욕망의 노예가 된다. 우리는 자아를 상처 입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자아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껴서 분노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끝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끝없이 신경을 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자존감을 얻어 낸다. 하지만 이것이 잘될 때만 좋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면 우리는 금세 상처 받고 우울해지고 만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도대체 그럴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자아는 그저 끝없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원하고 있다. 자아의 태생이 바로 인간 사회 속 경쟁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타인의 관심은 승리를 의미한다.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은 바로 금메달을 딴 사람이다.


그런데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정말로 좋은 일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좋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오늘 얼굴이 예뻐 보인다는 말을 한 것과 같다.

 

그 말이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사실상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로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이유는 서로 어떤 식으로든 이득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이득과 관련이 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이득에 관련되어 있기에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수학 공식처럼 명백하다.

 

우리는 그저 자신의 행복에 도움을 주는 존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혹은 관계를 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것은 관계 중 가장 끈끈하다고 알려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최초의 행복 시작점을 자아가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아는 끝없는 욕심을 가진 존재이다. 자아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그렇게 끝이 없어 보인다.

 

높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은 힘든 과정들은 어느 정도 그 자아를 만족시킬 수 있다. 즉, 자아의 완성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것이 남들이 잘 하지 못하는 것일수록, 어려운 난이도를 가진 것일수록, 독특한 것일수록, 남들에게 가치 있다고 인정 받는 것일수록,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일수록, 행복한 것일수록 자아는 많이 채워진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을 하나 꼽는다면 무척 어려운 일을 오랜 시간 힘든 노력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가치를 이뤄낸 순간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가장 근접한 순간이 아마도 올림픽 경기에서 새로운 세계 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따는 순간이나 메이저 급 골프 대회 우승 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의 학자로써 세상을 뒤집을만한 새로운 발견을 해내거나 차원이 다른 사고 수준의 논문을 발표했을 때일 것이다.

 

과거의 인간들에게는 이럴 수 있는 기회가 제법 있었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도 쉬웠고, 세계 최초가 되기도 쉬웠다. 북극도 남극도 모두 처녀지였고, 에베레스트 산도 아무도 오른 적이 없었다. 그 전에는 아메리카 대륙 자체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이 쉽지 않다. 참 쉽지 않다. 남들과 차별되게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은 정말로 힘들어지긴 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요즘 시대엔 자아를 완성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을 자아 상실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불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불행한 것인지를 좀 더 잘 살펴봐야 한다. 이미 설명했듯이 자아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성된, 타고난 결함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이미 결함이 있는 것을 가지고 만족을 하려고 쓸데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자아의 욕심은 언제가 우리를 괴롭힌다. 제대로만 되면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높은 산에 올라도 그것의 효과는 1년도 채 가질 못한다. 우리는 또 다시 산에 오를 준비를 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만족할 만큼 높은 산이 한정적이란 것과 자아는 결코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같은 산을 반복적으로 오르는 것은 금세 일상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고, 다른 산이라도 난이도가 비슷하다면 자아를 제대로 만족시키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런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산소 마스크를 벗거나 혹은 더 힘든 코스를 도전해야 한다.

 

그러다가 죽기도 한다. 즉, 우리는 자아를 만족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이것이 자아가 가진 최악의 속성이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특별하고 힘든 노력에 의해서 자아가 일정 부분 채워질 수는 있지만, 결코 꽉 차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자아는 요술 주머니처럼 채우면 그만큼 늘어나 버리고 만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그것을 단지 채우는 것이 아니라 꽉 채우는 것이었기에, 채우려고 한 노력들은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채우는 만큼 늘어나는 것을 어떻게 완전히 채울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채우는 노력을 할 가치는 있다. 그것은 바로 자아를 채울수록 결코 그것을 채울 수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채우려고 노력해보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높은 산에 올라야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우주를 나가봐야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무엇인가 힘들게 노력을 해봐야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의미한 존재인지 알게 된다.

 

이 세상이 100이라고 알고 있을 때, 자신이 50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면 20지점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삶은 어리석고 무의미해 보인다. 도대체 왜 저기에서 저렇게 궁상맞고 찌질한 욕심을 부리면서 사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자신은 벌써 100의 중간쯤 왔으니 그럴 만 하다.

 

하지만 더욱 노력해서 100에 다가가려고 할 때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100이라고 알았던 세상은 사실 만이며 억이며 조였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결국 무한대였음을 말이다.

 

그래서 100의 세상에서는 자신이 남들의 두 배 이상이었는데, 무한대의 세상에서는 자신과 남들의 차이는 사실 없는 것과 다름없음을 알게 된다. 무한대가 아니더라도 1억만 해도 50과 20의 차이가 얼마나 나겠는가?

 

100원에서 50원과 20원은 크지만, 1억원이 있을 때 50원과 20원은 도대체 얼마나 크게 차이가 나게 느껴질까?

 

우리가 더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진실은 이 세상은 1억을 넘어서 1조를 넘어서 1경을 넘어서 무한대로 있다는 것뿐이다. 이것이 이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면, 더 높이 올라가려고 노력하지 않았거나 노력했다고 해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노력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사람이 자아를 완성 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꽤나 오만해진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 어렵고 힘든 도전을 하는 것,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서는 것, 그것을 성공하는 것, 돈과 명예를 얻는 것이 바로 그 오만을 키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많은 것을 이룰수록 목이 뻣뻣해지고 눈을 내려 깔려고 한다. 물론 방송에 나올 때는 겸손을 떤다. 그래야 더 존경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그저 운이 조금 좋았던 것이다. 만약 그 과정에서 정말로 제대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다면 그 오만함이 남아 있질 못한다.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세상의 무한함을 느꼈다면 결코 그 상태로 머물 수가 없다. 우리는 저절로 겸손해진다. 딱히 겸손을 떨 필요가 없어진다.

 

자아는 그 무의미함을 알기 위해서 완성시키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다. 웃기는 말 같지만, 사실이다. 우리가 자아를 완성시키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그것이 사실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밖에 없다. 50에서 100으로, 100 에서 1,000으로 올려봐야 무한대까지는 단 1도 가까워지지 못함을 알게 되면 당연한 것이다.

 

높은 산에 오를 생각도 하지 않고 살든, 높은 산에 올라서 오만해지든, 높은 산을 오른 후 자신의 초라함을 경험했든 모두 개인적 영역이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강요할 수도 누가 그것만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타고난 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후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스스로 위로해서도 안 된다. 아무것도 안 하다면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오늘 거대한 우주를 상상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짧고 무의한지 허무함을 느껴봐야 아무 의미없다. 급하게 똥이 마려우면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가까운 화장실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안드로메다 은하가 화장실에 비해서 중요할 이유가 없다. 이것을 모른다면, 정말로 급하게 똥이 마려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모두 어리석다  (0) 2016.09.07
돈에 관한 해묵은 논쟁  (0) 2016.09.05
각자의 영향력  (0) 2016.08.27
확대해석에 숨겨진 본질 - 3  (0) 2016.08.11
확대해석에 숨겨진 본질 - 2  (0) 2016.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