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여자로 산다는 것

아이루다 2016. 8. 24. 09:05


여자로 살아 본 적은 없으나, 살아오면서 겪은 이러저러한 사건들과 간접적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여자의 삶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 글은, '여자로 산다는 것' 편과 '남자로 산다는 것' 두 편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이 글에 특별히 부제를 붙이자면, '이 땅에서' 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지구 전체적으로 여자라는 존재로부터 발생하는 공통적 문제들이 있지만, 또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여자이기에 더욱 더 심화된 문제들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여자로 산다는 것' 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 과 다른 점은 바로, 여자이기에 가진 특징에서 생겨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육체적인 입장에서 약자이다. 즉,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힘이 약하다. 여자, 아니 자연계 전체에서 암컷이 수컷보다 몸이 작은 경우는 보편적이다. 특히 포유류에서는 많은 종류의 동물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란 뜻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왜 여자 혹은 암컷은 남자 혹은 수컷에 비해서 몸이 작을까?

 

이것의 가장 기본 원인은 바로 짝짓기 방식에 있다. 즉, 자연계에서 수컷은 암컷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수컷은 점수를 따기 위해서 좀 더 나은 유전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계에서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오직 강한 힘밖에 없다. 또한 강한 힘은 최대한 큰 몸에서 나온다.

 

그러니 수컷이 암컷보다 육체적으로 더 발달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강한 수컷일수록 후손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으니, 수컷들은 점점 더 강한 후손으로 발달한 것이다. 이것은 종의 미래를 위해서는 대단히 합리적인 정책이다.

 

물론 화려해진 쪽으로 발달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공작새와 같은 터무니 없는 화려함을 가진 경우도 많다. 인간과는 다르게 자연계에서는 수컷이 암컷에 비해서 훨씬 다채로운 색상과 화려한 무늬를 가진 경우도 많다. 하지만 화려함은 자신을 노리는 포식자에게 노출이 되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강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 현상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 것이다.

 

현대 문명을 사는 우리는 육체적 능력을 그다지 중요한 능력으로 뽑지 않지만, 100년 전만 해도 육체적 힘은 노동력 중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과거 이 나라에서 씨름이란 경기를 통해 힘이 쎈 사람을 뽑아서 황소를 준 일은 그저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강한 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여자는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이 차이점으로 인해서 여자는 평생 동안 커다란 문제 앞에 놓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성폭력을 포함해서 각종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근본적이며 치명적이다.

 

일단 여자로 태어나면 혼자서 뭔가 많은 제약이 생긴다. 혼자 여행도 힘들고, 혼자 밤길을 걷는 것도 힘들고, 혼자 사는 것도 힘들다. 이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남자인 입장에서 이런 제약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면, 정말로 많이 답답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행동의 자유가 어쩔 수 없이 타고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TV에서 한참 방영했던 '나는 자연인이다' 이란 프로그램에 여자가 출연한 경우는 거의 없다. 뭐, 혼자 사는 여자가 어느 정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비율은 현저하게 낮다. 오지에서 여자 혼자서 사는 삶은 꽤나 위험해 보인다. 실제로 그 정보가 노출되었다가는 범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아주 특별한 여자들은 이 한계를 뛰어 넘기도 한다. 남자보다 더 대범하게, 남자보다 더 용기 있게 도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많이 힘들 것이다. 보통 여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자는 일종의 보디 가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은 주로 남자가 맡는다. 왜냐하면 여자가 두려워하는 폭력의 주체가 바로 대부분 남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자가 다른 여자의 폭력에만 노출된다면, 혼자서 싸워볼 만 하다고 느낄 것이다. 적어도 그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육체 능력 차이는 마치 어른과 아이 수준으로 차이가 난다. 물론 여자가 많은 노력을 해서 강한 몸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야 보통 운동을 따로 하지 않는 남자 수준이다. 남자는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얻는 근력을 여자는 끝없는 운동을 통해 얻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힘들다. 더군다나 이 땅의 남자들은 근육 있는 여자를 그다지 선호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자가 자신만의 보디 가드를 만드는 방법이 바로 결혼이다. 그런데 이 보디 가드를 잘 고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성공률이 반도 채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골랐더니 남의 편이다. 그래서 남편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한 가지를 더 요청한다. 그것은 바로 육아를 위한 도우미 역할이다. 물론 남자도 임신에는 조금 관여했고 또한 자신의 후손이기에 기본적으로 관심과 책임은 있다. 하지만 여자만큼 되기는 힘들다.

 

이 추가 요청에 관련된 내용들이 여자들에게 있어서 두 번째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한 두려움이다. 여자는 남자처럼 아무나 하고 섹스를 할 수 없다. 그것이 잘못될 경우 고스란히 여자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피임을 통해 노력할 수 있지만, 모든 여자가 그리 주도 면밀하지는 못하다. 서툴고 경험이 부족한 여자는 준비 없는 섹스를 하게 마련이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그래서 여자는 결국 낙태를 하거나 혹은 미혼모가 되어야 할 수도 있다. 이 둘 모두 여자의 삶을 크게 흔든다.

 

남자들은 낙태 경험이 있는 여자를 결코 선호하지 않는다.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순결하지 않음, 몸을 함부로 굴림,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인식할 경우가 많다. 미혼모는 더욱 더 심각하다. 애가 있는 여자를 어떤 남자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아이는 고아원에 가거나 입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당사자에게 평생 마음 속에 남은 죄책감이 된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책임감은 누구에게도 말 못할 아픔이 된다.

 

여자가 경험하는 세 번째 문제점은 언제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란 점이다. 여자는 짝을 고르는데 있어서 수동적이다. 남자들은 좋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피나게 경쟁한다. 물론 여자들도 경쟁한다. 그런데 남자들은 주로 자신의 능력을 겨루는 반면, 여자들은 외모를 통해 경쟁한다.

 

물론 외모도 능력이다. 그런데 외모의 능력은 다른 능력에 비해서 매우 독특한 면이 있다. 그것은 정말로 직접적이고 매 순간 그 효과가 즉석 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외모 이외에 이런 특징을 가진 능력은 없다.

 

어떤 남자에게 같은 부탁을 할 때, 예쁜 여자의 부탁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자연 법칙에 의해서 남자들은 쉼 없이 여자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한다. 그 덕분에 예쁜 여자들은 어딜 가나 아주 작은 이득이라도 얻는다. 설령 실제적인 이득은 없더라도 눈 앞에 있는 잘 모르는 남자의 선의와 친절함을 경험할 수 있다.

 

대신 못생긴 여자들은 같은 상황일 때, 선의와 친절함 대신 무뚝뚝하거나 사무적인 태도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남자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 왜냐하면 남자는 원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남자들도 어떤 면에서는 불쌍하다. 끝없이 낯선 여자들에게 선의를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 놓을 때, 어쩌다가 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짝이 이미 정해진 남자들도 그런다는 것이다. 남자는 도대체 멈추질 않는다.

 

외모의 차이로 인해 받는 차별은, 여자들이 감당해야 할 아주 커다란 문제가 된다. 사실 폭력과 임신에 대한 두려움은 근원적이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있는 사건은 아니다. 그런데 외모의 차별로 인해 받는 고통은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남자도 능력에 따라 차별을 받긴 하지만, 그것은 그저 특별한 경쟁 속에서만 이뤄진다. 하지만 여자의 외모의 차별은 매일, 매 순간,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진다. 이것은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커다란 스트레스이다. 그리고 끝없는 열등감을 갖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외모로 인해서 끝없이 평가 받고, 그것으로 인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소소한 차별을 경험해야 하는 삶이 좋을 것이 없다. 이것을 극복하려고 성형수술을 하면, 또 성형 수술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이 악화된 경우, 네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남자들의 노골적인 외모 평가이다.

 

여자들 외모를 두고 이뤄지는 남자들의 평가는 때로는 예쁜 여자를 칭찬하면서 간접적으로 이뤄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못난 외모를 가진 여자를 직접적으로 비난함으로써 이뤄진다. 물론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이뤄질 가능성은 높으나, 어떨 때는 그런 말이 당사자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다.

 

못생긴 외모에 대한 지적질, 뚱뚱한 몸에 대한 지적질, 옷차림에 대한 지적질 등등 여자의 외모에 대한 지적질은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현상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나, 못 배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나 마찬가지다. 표현 방식만 다를 뿐,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그래서 보통 외모적으로 하급에 속하는 여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평가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사자에게 정말로 심각한 수준의 고통이 된다. 이것은 자아가 파괴되는 고통이다.

 

물론 남자들도 그것을 경험하긴 한다. 하지만 남자들에게 있어서 외모는 여자에 비해서 선택적이다.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커트라인만 통과하면 된다. 즉, 여자들에게 있어서 남자의 외모는 도저히 같이 다닐 엄두가 나질 않는 정도만 넘으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 키스를 할 때 구역질만 나질 않는다면 통과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반면에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의 외모는 항상 최고의 수준에 있다. 남자들은 가능하면 젊고 예쁜 여자를 원한다. 자신의 처지에 상관없이 말이다.

 

여자는 폭력, 임신과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 그리고 외모로부터 받는 직접적으로 일상적인 차별과 비난에 가까운 지적질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것에 있어서 여자가 한 잘못은 없다. 여자는 그저 태어난 이유로 이 많은 불행을 감당해야 한다.

 

힘이 약한 것도, 자궁을 가져서 임신을 할 수 있는 것도, 타고난 외모도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으로 인해서 평생을 시달려야 한다.

 

설령 타고난 외모가 아름답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자들이라고 해도 폭력과 임신의 공포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위로 위로 올라가다가 남자들이 가진 거대한 기득권 앞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도 역시 이미 존재하는, 여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차별이다.

 

그나마 이런 좌절 경험은 성공한 소수의 여자들에게 국한된다. 그리고 이 벽을 경험한 여자들은 폭력, 임신, 기득권 차별을 기반으로 해서 강한 반동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가 바로 이런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경쟁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 위안하고자 한다. 문제는 사실상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혹은 능력 부족으로 일어난 실패까지도 묶어서 동일한 차별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즉, 기존에 당한 것이 많아서 실제로는 정정당당하게 경쟁되었지만,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실패를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고, 차별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아픔을 공감해주길 바라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질 않는다. 이것이 심화되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편견이나 잘못된 관행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래서 자기 성찰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 반성이 없는 존재는 발전할 수 없다. 이 상황이 반복될 경우, 여자는 끝없이 외부로 문제의 원인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은 기존의 여자가 가진 문제와 실제로 자신이 가진 문제가 뒤섞이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정말로 강한 폭발력을 가지게 된다. 당사자의 삶을 완전히 초토화 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 총체적인 문제점인, 다섯 번째의 문제점이다.

 

이 다섯 번째 문제점으로 인해서 여자는 자신이 타고난 피해자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어디에서든 자신이 배려 받아야 한다고 느낀다. 아니, 여자기 때문에 받는 배려를 사실상 권리로 인식한다. 이 현상은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으며, 남자들이 불만을 갖는 큰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심화된다.

 

그리고 상호간의 혐오가 시작된다. 또한 그 혐오의 원인을 상대의 태도로부터 찾는다. 즉, 남자는 여자가 먼저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여자는 남자가 먼저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누가 먼저 시작한 일이 아니다. 여자가 힘이 약해서 폭력에 노출되고, 임신을 할 수 있어서 두려움을 갖고 있고,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선호하는 것은 그저 자연계의 법칙이다. 물론 그것을 대 놓고 드러내는 남자들의 문제는 있다. 이것은 남자들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자신이 경험하는 패배를 모두 차별로만 평가해버리고, 자신이 여자이기에 받은 배려는 모두 권리로 인식하는 것도 결코 옳은 태도는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각자 원인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지적질 할 입장이 아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자는 확실히 약자였고 많은 손해를 감당해야 했다. 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차별을 받아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여자를 배려한 정책들이 많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과도하게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 각종 여성 전용 시스템들이 바로 그런 예이다. 물론 좋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여자를 너무 약자로 몰아 붙이는 현상까지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자들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피해의식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남녀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점점 혼인율이 낮아질 것이다. 즉, 갈등 주체끼리 만나서 서로를 이해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차별과 갈등은 서로를 잘 모르기에 발생한다.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삶을 공유할 때 차별이 줄어든다.

 

그러니 이대로 가다간 남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지기만 할 뿐,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아주 큰 비용을 발생시킬 것이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서로를 지적질 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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