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해는 한다. 하지만..

아이루다 2016. 2. 14. 07:30


 

우리는 보통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이해한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이해라는 단어는 언어적으로 어떤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좀 불명확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이해라는 단어가 가진 뜻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되어 사용 가능한데, 각각의 의미는 서로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를 쓸 때, 각각의 의미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쓴다. 그런데 그것은 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이해는 흔히 '알다' 라는 말로 사용된다. 새로운 수학 공식을 보고 이해하게 되면, 그것을 안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알게 된 경우도 같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대부분의 지식들을 이해했다는 표현이 가진 의미는, 바로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 이해는 아는 것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받아들인다' 라는 뜻의 이해이다. 이것은 주로 사람과 사람간의 사이에서 나타나는 표현인데, 흔히 말하는 '너를 이해한다' 라는 뜻은 '너를 알겠다' 라는 의미보다는 '너의 입장을 내가 받아들인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첫 번째의 이해, 즉 '안다' 는 뜻의 이해는 오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물론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있으나, 그것은 그냥 착각일 뿐이다. 하지만 두 번째인, '너를 받아들인다'라는 의미의 이해를 오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표현을 쓴다.

 

"너를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과연 '알다' 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즉, 우리는 각자가 서로에게 지식이나 정보로써 이해될 수 있느냐에 대한 생각이다.

 

과연 인간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조금 복잡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식적 이해한다는 것이 가진 의미는 바로 이성적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학과 물리와 경제 이론을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이성적 능력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존재는 그것들과 완전히 다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의 키 높이, 체중, 얼굴 유형, 피부에 난 상처의 크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왜 그 사람이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즐겁거나, 슬퍼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감정적으로만 이해가 된다. 그래서 이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공감이다.

 

그래서 인간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마치 사랑을 강의로 배운 사람과 같다. 그것은 행복의 비법을 책으로 배운 사람과 같다. 그것은 믿음을 이성적으로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결국 공감을 이성적으로 하는 것과 같다.

 

원래 지식은 명료하다. 지식은 경계가 뚜렷하다. 지식은 음성이나 문자로 표현이 될 수 있다. 지식은 그래서 쉽게 디지털화 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불투명하다. 인간은 경계가 모호하다. 그래서 우리는 음성과 문자로 표현은 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를 매우 대충 설명하는 것이다. 누가 말과 글로써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결코 그것을 해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감정을 디지털화 하는 것은 현재까지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도 감정의 존재를 통해서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는데 크게 동의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식적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돌멩이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이며, 느끼는 존재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단지 생존에 더 도움이 되는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그저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가장 좋은 느낌을 행복이라고 부를 뿐이다.

 

물론 인간을 지식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와 분자 구조, 각 기관의 역할, 근육이 힘을 낼 수 있는 원리, 감기가 걸리는 이유 등을 지식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까지가 한계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감정과 감성, 사랑과 행복을 지식화 시킬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표현은, 누군가를 안다는 뜻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 누군가를 받아들였다는 뜻이 된다.

 

결국 '받아들인다' 는 입장의 이해로 앞의 표현을 바라보면, 저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다. 받아들이는 이해하고 난 후, 그것을 부정하는 '하지만' 이 붙을 수 없다. 누군가를 이해했다면,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이미 받아들였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그냥 '알겠다' 는 의미의 이해를 의미한다.

 

안다는 뜻의 이해는 그냥 정보를 알게 된 것이다. 왜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만 화를 내라고 주문할 수 있다. 알겠지만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진 이해는 화를 내는 상대를 안아줄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계속 화를 내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아 줄 수 있다.

 

지식적 이해는 상대의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 아니까 더욱 명확하게 요구 할 수 있다. 하지만 받아들임의 이해는 그저 받아들이고 끝이다. 그나마 뭔가 한다면 선택적 조언을 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식적 이해의 입장에서 보면, 앞의 표현은 '너의 입장이나 처지를 알겠다. 하지만.. ' 이렇게 바뀌어야 맞다.

 

그런데 언뜻 생각해보면, '너를 이해 한다' 라는 표현이나, '너의 입장이나 처지를 알겠다' 라는 표현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쓸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표현을 정확히 구분해서 쓰지 않기 때문에, 입장을 알겠다는 지식적 이해를 스스로 착각해서 마치 자신이 상대를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착각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은 꽤나 심각한 오해를 불러온다.

 

상대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지 상대의 입장을 알기만 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대를 이해한 듯 군다.

 

이것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흔히 하는 잘못이다.

 

부모는 공부를 하지 않고 놀고 싶어하는 아이를 이해한다는 듯 말한다. 아이의 고민과 아이의 욕구불만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해는 하지만, 너는 지금 공부를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친구도 중요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욕구도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이를 정말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위해서 좋은 조언을 해주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자신이 이해한다고 말했으니, 그 자신이 아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믿는다. 단지 알고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자주 반항을 하고, 아이가 방문을 세게 닫고, 아이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 앞에 앉아 있을 때, 부모는 도대체 아이가 왜 저러는지 알고 싶어한다. 즉, 아이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 왜 아이가 저럴까 라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그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요즘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다. 하지만 아이가 그것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있었다면, 이미 그전에 먼저 말을 했을 것이다.

 

아이는 경험으로 안다. 자신이 지금 겪는 문제들을 부모에게 얘기해봐야 결국 그것은 다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릴 정보로써만 활용될 것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이는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를 부모와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감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

 

아이가 그러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과거에 부모가 말한 이해가 이미 단지 지시적 의미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신이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못했음을 본능적으로 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아이는 끝없이 제제만 당했다. 하지 말라는 소리만 들었다. 포용되고, 받아들여지는 이해를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이것이 보통 아이들이 삐뚤어지는 이유가 된다.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아이는 점점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열어놔 봐야 자꾸 들어와서 보고 나서는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바꾸려고만 한다. 있는 그대로 보고 나가서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면 볼수록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만 지적하려고 한다. 부모가 살아온 삶을 옳은 것이라고 정해 놓고 말이다.

 

그것은 집에 친구를 초대했더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말만 해주면 되는데, 냉장고를 잘못 샀다거나, 집이 배치가 이상하다는 등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친구를 또 초대하고 싶겠는가? 그것들은 고칠 수 없는 것들이다. 고칠 수 있는 조언을 해줘야지, 고칠 수 없는 조언은 무의미하다.

 

결국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아이는, 절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설령 목숨을 끊지 않는 아이라고 해도, 아이는 거의 영원히 마음을 닫게 된다. 그리고 부모에게는 단지 지식적으로만 대한다.

 

사람을 지식적으로 대한다는 의미는, 사람을 대하는 지식적 방법론에 따른다는 뜻이다. 즉,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예의는 당연히 지식이다. 예의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 행위를 정의한 지식이다. 그래서 예의로 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예의를 갖춘다고 해서 두 사람이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알게된 부모는 아이의 삶을 조정하려 든다. 알고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려고 한다. 부모의 경험은 아이의 미래가 된다. 모든 결정은 부모가 내린다.

 

하지만 아이를 받아들인 부모는,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아이를 받아들인 부모는 아이를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아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이의 뜻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준다. 그리고 부모는 단지 아이가 갖지 못한 경험을 조언으로 해준다. 모든 결정은 아이가 내린다.

 

원래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 무척 힘든 일이다. 우리가 원래 다 그렇다.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진 이해는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다른 사람을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아이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심지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 자신이 상대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상대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갈등의 불씨만 될 뿐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어떤 장점이 가진 어쩔 수 없는 단점일 가능성이 높다. 즉, 동전의 양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적 이해를 통해 동전의 한 면만을 버릴 것을 바란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요구일까?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동전을 모두 버리거나, 한 면도 버리지 않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지식은 분리된 것이기에 마음 먹기에 따라서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아날로그적 존재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분리해낼 수가 없다.

 

그래서 받아들인다는 말은 바꾸기를 바라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바꾸길 바라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결코 좋게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짓이며, 그 사람을 무너뜨리는 파괴적 행위이다.

 

우리는 타인에 의해서 바뀔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을 통해서만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아내와 남편을, 아이를, 친구를, 부모를, 형제와 자매를, 회사 동료를, 심지어 전혀 모른 연예인이나 어딘가에서 보거나 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입장이 직접 되어보지 않고는 결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그럼에도 이해한다는 표현을 그리 쉽게 쓰는 이유는, 적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라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가난한 집에서 배를 곪고 사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알 수는 있다. 다큐멘터리만 봐도, 배가 고프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충분히 설명이 나온다. 그 자신도 어떤 병에 걸려서 며칠 제대로 못 먹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기억을 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가난한 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단지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변비가 심해 크게 고생해서 똥을 싸고 난 후, 여자가 아이를 낳는 고통을 이해하겠다는 소리와 같다.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남자는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을 하는 것이 가진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젊은이는 늙은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 알 수는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머리가 나쁜 사람이 공부를 하기가 얼마나 힘들지 알 수는 있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얼굴이 못생긴 여자가 겪는 고통을 알 수는 있다. 키가 큰 남자는 키가 작은 남자가 겪는 열등감을 알 수는 있다.

 

이렇게 단지 알 수만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늙은 사람의 힘듦을 이해하고, 머리가 나쁜 사람을 이해하고, 얼굴이 못생긴 여자를 이해하고, 키가 작은 남자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힘듦과 고통과 열등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공감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상태냐에 상관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고쳐야 한다고 생각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알게 된 지식이, 그 자신에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고치려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정말로 마음이 넓어질 수 밖에 없다. 사실 그래서 힘들다는 말이다.

 

그나마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처지를 알게 되어서, 약간의 틈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연을 알면 조금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언제라도 그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가 일어난다면, 조금 받아들였던 것들은 금세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조건부이다. 그 조건이 유효한 상황에서만 받아들여진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이 세상 사람 모두를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자신의 주변에 있는 애인, 아내,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 부모, 형제들까지는 모두 제대로 이해를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자신은 그냥 아는 수준의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이며, 우리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그들을 모두 알기만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받아들이는 수준으로 높아져야 한다.

 

그들 하나하나를 단지 알기 때문에 단점을 지적하고 고치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 하나하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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