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겸손함이 가진 의미

아이루다 2016. 2. 10. 08:43

 

 

옛말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각각의 낱알이 익어서 무거워지니,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벼가 숙여지는 모습을 본 옛날 사람들이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연상해서 만들어 낸 상징적 의미를 가진 속담일 것이다.

 

그리고 이 속담이 가진 뜻이 바로 겸손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겸손함을 꽤나 중요하고, 좋은 덕목으로 여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 겸손함은 사실 꽤나 좋은 역할을 하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겸손함의 반대말은, 아마도 건방짐이나 혹은 잘난 척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두 단어를 생각만해도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보면, 겸손함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좋은 것인지 느낄 수 있다.

 

누군가 정말로 인간관계의 정석을 알고 싶다면, 겸손함이 최고의 답이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겸손함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겸손 하려면 일단 먼저 잘나야 한다는 점이다. 잘나야 겸손함을 떨 수 있는 것이지, 잘나지 못했는데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 그것은 좋은 쪽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인정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자기는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지만, 부모님과 친구들의 도움 덕분에 이 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한 태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앞의 말은 할 수 있지만 뒤의 말은 이어갈 수 없다. 즉, 자신은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을 끝낼 수 밖에 없다. 공부를 잘했어야 뒷 말을 이어가는데,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멍청함을 인정한 사람이 되고 끝난다.

 

겸손한 태도는 꼭 공부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도 가능하다. 사실 남들보다 뭔가 조금이라도 잘난 것이라면 뭐든 가능하다. 그래서 잘난 사람만 할 수 있는 겸손한 태도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우리는 잘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잘났다 싶으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그래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런 우리들의 심리로 인해서, 누구나 겸손함이 관계에 있어서 좋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나마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여러 방면에서 다 잘난 사람이나 가능하다. 스스로 잘났다고 말하지 않아도, 남들이 나서서 잘났다고 인정해주는 수준의 사람 정도가 되어야 겸손을 떨 수 있다.

 

문제는 하나쯤은 잘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많은 데, 다방면에 걸쳐서 잘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해서 지금 세상은 그 잘남이 돈과 많은 연관이 되어야 더 대접을 받는데, 산을 빨리 오르는 능력이나, 글씨를 제법 예쁘게 쓰는 능력 같은 것들은 인정은 받지만 큰 도움은 되지는 않는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겸손함에 대한 설명이다. 하지만 사실 겸손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이해를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겸손함은, 대부분 가식이다. 그것은 잘남을 더욱 더 값어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오랜 시간 훈련 받은 결과이다. 그래서 겸손함을 떨면 떨수록 더욱 더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그 태도를 통해서 그 가치를 더욱 더 높이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미 상대의 '인정' 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반대로 우리가 겸손하지 못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즉, 상대가 자신의 잘난 부분에 대해서 칭찬을 하거나, 대단하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을 떨 여유가 없다. 만약 상대가 그래 줬다면, '뭘 그리 대단한 것을 했다고 그래' 라고 하면서 겸손을 떨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의 잘남을 더욱 더 높여주고 싶지 않아하기 때문에, 좀 처럼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또한 서로 칭찬에 인색하고, 인정하는 것을 쉽게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함을 떨 기회를 놓치고, 결국 스스로 그것에 대해서 자랑을 하려고 할 수 밖에 없다.

 

서로 칭찬해주고, 서로 겸손을 떨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겸손함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인간관계에 있어서 좋은 처세술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겸손함은 별도로 존재한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이 한참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기 위해 경쟁할 때, 실제로 달에 착륙했던 아폴로 11호 전에, 아폴로 8호는 최초로 달을 한 바퀴 돌아서 지구로 돌아왔는데, 이때 인류 처음으로 달의 뒷면을 보게 되었다. 원래 달은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동일해서 늘 한 면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직접 날아가서 보지 않는 한, 그 뒷면을 볼 기회가 없는 존재이다.

 

아무튼 아폴로 8호가 달을 돌아서 다시 나오는 순간, 그 우주선에 타고 있던 조종사는 달의 뒷면으로 향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구가 보이지 않는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아니, 그것은 인류 중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리고 짧은 어둠의 시간을 통과한 후 다시 눈에 보이는 푸른 행성, 우리 지구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경험한 당사자가 아니니, 그때 기분을 묘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설령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고 해도 묘사할 수 있을까? 이런 경험은 사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지구인을 위해서 그가 알고 있던 가장 종교적인 서적, 성경의 창세기를 읽기 시작했다.

 

종교인들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사실 여기에서 '성경'을 읽은 것은 그리 중요한 의미는 아니다. 그가 불교인이거나 힌두교인이거나 이슬람교인이었다면, 각각 자신이 믿는 경전을 읽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신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여담으로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으며, 대화 내용은 텔레비전 방송이 되었는데, 이때 TV 시청률은 미국 역대 최고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겸손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잘난 척을 하지 않고 겸손함을 떤다는 표현 중에 나타나는 겸손함과는 달리, 무엇인가 거대하거나, 위대하거나,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존재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의미의 겸손함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평범한 우리들은 달로 가서 지구를 볼 기회는 없지만, 그럼에도 살면서 아주 가끔 자연의 위대함에 대해 느끼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높은 산에 올라서 끝도 보이지 않는 산들을 바라볼 때, 태풍이 다가와서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칠 때, 그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을 알리는 새싹이 올라오는 모습을 바라볼 때, 올해 태어난 아기 새가 처음 비행을 하려고 할 때, 자식을 지키려는 어미의 마음이 느껴질 때 우리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종류의 순간에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겸손함이다. 우리가 그리 중요하게 여기고, 우리가 그토록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 '삶'에 대한 겸손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순간에 이런 겸손함을 느끼게 될까?

 

그래서 다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에 겸손함의 진짜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벼는 일년 동안 열심히 낱알을 키웠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열심히 낱알을 키우지 않는 벼는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겸손함을 느끼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정말로 많이 생각하고, 많이 행동했을 때이다. 이때 우리의 잘남과 못남, 그것의 결론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사실 상관이 없다.

 

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삶을 통해서 정말로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서 그것을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자신 있어지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고, 마치 정복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무엇인가를 이루고, 타인의 칭찬을 받고, 겸손함을 떨게 된다.

 

하지만 이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한계를 자각할 수 밖에 없다.

 

히말라야 산맥의 에베레스트 산을 처음 오를 때, 우리는 마치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자부심이 한 없이 치솟고, 누군가를 만나도 산을 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산을 수 없이 반복적으로 오르고 내리면서 삶과 죽음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엔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올랐다는 자부심이, 사실은 산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다는 식의 믿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평생 도자기를 구운 도공이나, 평생 그림을 그린 화가나, 평생 작곡을 한 작곡가나, 평생 과학을 연구한 학자나, 평생 인간에 대해 생각한 철학자나, 평생 정치를 한 정치가나, 평생 고기를 잡은 어부나, 평생 주식을 한 주식 투자가들 모두가 그렇게 된다.


무엇이라도 한 분야를 평생 동안 하고 난 후,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하면 할 수록 어렵다는 말이다. 도자기를 구우면 구울수록, 주식을 하면 할 수록 어렵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 누구나 그럴 수 밖에 없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뤘다면, 그것은 운이 좋아서 일어난 일일 뿐이란 점을 스스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통 한두 번 정도의 성공을 경험하고 나면, 더 이상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

 

즉, 에베레스트 산을 한번 오르고 나면, 그것을 평생 동안 자랑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혹은 겸손을 떨면서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이렇게도 해석이 된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겸손함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정말로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뜻이다. 즉, 무엇인가를 제대로 진지하게 했다면, 우리는 결코 겸손을 떨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진짜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지구에서 이런 문명을 만들어 냈고, 달에 사람을 보냈고, 화성에 사람을 보낼 계획을 짜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위대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지적 생명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 개개인의 몸은 우리가 만들어 낸 자동차와 부딪히기만 해도 박살이 나서 형체도 찾기 힘들만큼 부서지게 된다. 우리는 단 5분만 물 속에 있으면 숨이 막혀서 죽게 된다. 우리는 먹고 마시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한다.

 

그 모든 것을 다 피해도 우리는 결국 늙어서 죽게 된다.

 

우리는 위대할지 몰라도, 우리는 한없이 연약하고 명백한 한계를 가진 존재이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르고, 지구에서 가장 깊은 곳을 탐험하고, 지구를 벗어난 공간에 갈 수 있지만, 우리가 너무도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우리들 중 대부분은 이런 경험조차도 할 기회가 없다.

 

그래도 우리는 각자 모두 겸손해질 기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평생을 쓰고 있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제대로 하려고 노력하며,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

 

즉, 겸손해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춰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지기만 하면 된다.

 

젊어서는 힘들지 몰라도, 나이를 먹었다면 반드시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았다면 말이다.

 

그래서 삶에 대해 겸손해지지 못한 늙음은, 사실 그 사람에게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고 만다. 그것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증거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겸손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자신의 삶에 진지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제대로 열심히 살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것은 잘났냐 못났냐, 성공이냐 실패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에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 겸손해지지 못했다면, 결국 우리는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잘남과 성공에 취해서 겸손을 떨면서 살았을 것이거나, 못남과 실패에 좌절해서 조그만 잘남을 떠버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이 둘 모두 단 한 번 살고, 그리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삶을 사실은 스스로 버린 행위이다.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좋은 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어느 시점에 자신의 삶을 판단할 때, 얼마나 제대로 살아왔는지 여부를 자신의 '삶에 대한 겸손함'으로 측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가진 재산도 아니고, 현재의 지위도 아니고, 전화기 목록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도 아니고, 장례식장에서 찾아온 조문객 숫자도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친구가 있느냐의 문제도 아니고, 평화로운 가정을 이뤘느냐의 문제도 아니고, 아이들이 잘 자라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삶에 얼마만큼 겸손해졌느냐에 달렸다.

 

우리가 제대로 살면 살수록 우리는 점점 더 겸손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진짜로 겸손해져야 한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남들은 결코 제대로 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바라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이 진짜로 겸손하지 못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사실 그것만 알게 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변화이긴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겸손을 떨면서도 자신이 실제로 겸손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 그것으로부터 혼란스러움이 시작되고, 결국엔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로 나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에 대한 겸손함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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