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소심함, 두 번째 이야기

아이루다 2015. 7. 18. 14:10

 
별 것 아닌 일에 과도한 신경을 쓰는 사람을 소심하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딱히 큰 일도 아니고, 그것이 되든 안되든 큰 상관도 없음에도 그것에 꽂혀서 스스로 사로잡힌 듯,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소심함은 당사자를 꽤나 피곤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주변 사람들 역시도 조금 피곤해 한다. 너무 작은 일까지도 모두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기분의 상태가 급격히 변하거나, 과도한 걱정을 하여 주변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결국 소심한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매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소심한 사람은 그 소심함으로 인해 과도한 감정을 낭비하는 것과 다른 이들로부터 점수도 잃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고 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소심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심함은 일종의 걱정이나 두려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밤이 되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겁이 나질 않을 수는 없다. 그나마 겁이 덜 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충분한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싸움 실력을 믿거나 혹은 적당한 무기가 있을 때뿐이다. 하지만 이런 해결책은 길을 잃고 있는 그 순간에 바로 적용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소심함은 결국 고민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소심함은 과연 왜 발생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예전에 소심함에 대한 글을 썼을 때, 그 소심함은 바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온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즉, 내가 어떤 상대에게 '바보' 라는 말을 했을 때, 상대가 기분이 나쁜 표정을 지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 이미 '바보'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빠져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경험을 해봤다고 해도, 그 경험 속에서 느낀 자신의 감정을 기반으로 상대를 파악하게 된다. 바늘로 찔렸을 때 고통은 비슷한 도구로 찔린 경험을 해본 사람이 이해할 수 있으며, 반면에 그 고통을 쾌락을 느끼는 일종의 변태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이 소심함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거의 모든 종류의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감정의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더해줄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착한 존재라고 믿고 싶어하는 착각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한 존재이기 바란다. 설령 악당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래서 악당들 역시도 자신을 속이든, 아니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속일 의도건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옹호하거나 스스로 정당성을 주장한다.
 
즉, 정말로 스스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설령 싸이코 패스라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인 범죄자라고 해도, 자신의 살인 행각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 이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우리가 착한 존재이기 바라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우리는 누구나 착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친절하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친절이고,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에게 받을 가능성이 있는 수 많은 종류의 이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우리는 착하게 살 때,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반대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해코지를 할 가능성조차 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란 평가로 인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돌을 맞을 수도 있다. 반대로 착한 사람이란 평가로 인해서 생명을 건질 수 있을 정도로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누가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 받고 싶지 않겠는가?
 
그리고 소심한 사람은 이 착한 사람이란 평가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과도하게 집착을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 착함에 대한 평가 자체는 이미 말했듯 개인적 경험과 판단에 따른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왜 소심함 자체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게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한 말을 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진 상대의 표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내 실수로 저 사람이 기분 나쁠지도 몰라. 아.. 저 사람 기분이 나빠졌으면 어떻게 하지? 난 절대로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가서 설명을 해야 할까? 오해하지 말라고? 그런데 만약 오해를 하지 않는 상태라면 어떻게 하지?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아냐? 아.. 고민된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경우에, 가서 물어보고 사과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속으로만 숨겨 두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잊어 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다음에 만났을 때 좀 더 과도하게 친절을 베풂으로써 자신의 결정되지 않은 실수를 무마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은 심리를 바라보면, 사실 우리 생각만큼 우리는 그런 순수한 의도로 상대를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저 사람이 내가 한 말을 오해해서 나에 대해 평가가 나빠지지 않을까?'
 
위의 심리와 방금 언급한 심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사실 어떤 실수에 대한 걱정이 최종적으로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으로 인해 차이가 난다.
 
상대의 기분이 나빠졌음을 걱정하는 것은 상대의 기분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나빠졌음을 걱정하는 것을 자신의 잠재적 이득이 줄어들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한 평판이 미래에 미칠 영향에 대한 걱정인 것이다.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길 바라지 않는다. 몰론 이것이 무조건 남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의 이유만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다.
 
이 현상이 좀 다르게 느껴지는 상황은 바로, 별 다른 이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거나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이 존재이다. 이들에게는 사실 거의 이득이 없음에도 다른 이들에게 헌신적 행동을 하는 모습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얻고 있는 그 무형의 이득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그들은 모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기 만족' 이란 이득을 얻고 있다. 사실 이 가치는 돈으로도 쉽게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야 말로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사실 소심한 사람들은 이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만족감은 그리 크지 않는 사람들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엔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들을 그냥 귀찮아서 넘어가거나, 그냥 손해보고 끝내버릴 것들에 대해서조차도 끝없이 손해와 이득에 대한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피곤한 것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손해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모르게 찾아올 행운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단 한번의 삶만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수 많은 순간에 선택했던 과정을 다른 쪽으로 틀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 지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즉, 지금의 인생과 다른 인생에서는,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한 노인을 도왔는데, 그 사람이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었고 낯선 이의 친절에 감동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주겠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아예 오지 않은 행운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현재가 바로 올 수 있는 모든 행운이 온 상황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니 우리로써는 당연히 현재가 자신이 가장 착한 상태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래야 올 수 있는 행운이 다 왔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이 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몹시 불안해지고 기분이 나빠진다. 왜냐하면 만약 자신이 자신의 생각보다 그리 착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과거에 얻지 못한 이득과 미래에 얻지 못할 이득에 대해 많은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큰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럴 때는 결국 누군가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서 자신이 한 행동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려고 애쓴다. 사실 이때 우리는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상황을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전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설명한다고 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보통 상대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동조를 해주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때 반대를 했다가는 관계가 끊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끝나고 나면, 자신이 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은 스스로 주장한 정당성과, 친구의 확인을 통해 자신이 착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확신한다.
 
물론 친구가 정말로 객관적으로 설명을 해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럴 경우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사과를 함으로써 자신의 잠시나마 나쁜 모습을 회개하고 다시 착한 존재로 돌아간다. 그리고 스스로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함으로써 어떤 경우엔 더욱 더 자신을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결국 전체적으로 소심함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면, 모든 소심함의 근원에는 바로 착함 증후군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소심함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에 대한 과도한 착함에 대한 기대치를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당연히 착함으로써 얻게 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미래에 올지도 모를 다양한 이득 분에 대해 미련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즉, 작은 선행을 한 후, 뿌듯해 하는 버릇을 최대한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 한번 도왔다고 해서 우리가 착한 존재란 뜻은 아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새롭게 진출한 체인점으로 인해 그 할머니가 하는 가게가 망해서 할머니가 폐지를 줍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 체인점을 기획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체는 착할 수가 없다. 그나마 우리가 착함을 신경 쓰는 이유는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은 관계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착함이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서 좀 더 이득을 얻기 위해서 착하게 살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도한 착함 연기는 자신에게 현실적인 손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소심한 사람들이 받는 힘든 스트레스의 일종이다.
 
그래서 가끔 서점엔 '나쁘게 살아라' 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책들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사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로 집착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충격 요법 식으로 나오는 책들이 바로 그런 종류이다.
 
물론 일부로 나쁘게 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착함 증후군이 스스로의 삶을 너무 크게 가로막고 있다면, 우리는 조금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말했듯, 덜 착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오게 될 작은 이득에 대해서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이득만 포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당당하게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평가에 대해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믿는 것만큼 선한 존재들이 아니다. 인류 전체에게 전염되어 있는 자신의 착함에 대한 거대한 착각이, 인간 자체에 금칠을 하고 인간 우월감을 갖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음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자신의 착함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 있기가 좀 더 수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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