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절망에 대해서

아이루다 2015. 1. 10. 09:18

 
하루를 마치고 잠이 들 때, 다음 날 눈을 뜬 후 맞을 아침이 두려워 본 경험을 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살아오면서 적어도 아침에 눈이 뜨는 것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다. 물론 어떤 문제들로 인해서 묵직한 기분으로 일어난 날은 있지만 말이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밥을 굶어 본 적도 없다.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혹독했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조차도 밥 세끼는 잘 먹였다. 단지 그 밥이 그리 맛이 없었을 뿐이다.
 
대학 시절, 겨울에 난방이 되지 않는 자취 방에서 몇 주를 살아 본 기억은 있다. 그래도 그리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도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부모님이 있는 따뜻한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추운 날 아침에 찬물로 머리를 감으면서 악 소리를 내면서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을 비참하게 여기진 않았다.
 
아마도 나 나름대로의 고생은 사회 초년 시절에 살았던 옥탑 방이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서울에서 전세 천오백만 원에 들어간 신림동 한 구석에 있는 옥탑 방. 수압이 약해서 졸졸 나오는 물과 여름에는 찌는 듯한 더위, 그리고 겨울엔 사방에서 몰려드는 한기로 인해 힘들었지만,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사는 즐거움과 더해서 일을 하고 있기에 매달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으로 먹고 자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단지 고생이기 때문이다. 원래 희망이 있는 고생은 순간의 고통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희망만 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 감당하기 힘든 고통조차도 버텨낼 수 있다. 이것을 특별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이 아주 작은 고통일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미래에 대한 그 아무런 기대도 없는 말 그대로 절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단 한 번도 정말로 제대로 된 절망을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가진 그 어떤 고통에 대한 기억도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기껏해야 시험에 떨어지거나 몸이 크게 다치는 정도 수준이었다. 그것도 모두 다른 대안이 있었고 치료비가 없어서 치료를 못하지도 않았다.
 
절망이란 것, 결코 쉽게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경험을 해보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나름대로 쉽게 바라본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에게도 역시나 쉽게 말한다. 죽을 용기로 살라고, 그 정신 상태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하냐고, 누구는 그런 고통 당해보지 않았냐고 하면서 그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늘어 놓는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모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겪은 그 어떤 과거의 고통도 희망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실은 절망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시한부의 삶을 판정 받은 상태에서도 돈이 없어서 수술조차 시도를 못하고, 돈이 없어서 저녁을 굶은 채 잠이 들지만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다를 것이 없는 그런 날이 반복되어 결국 아침에 눈이 떠지는 것이 진정으로 두려운 그런 날을 지내보지 않았기에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도 단 한 번도 그런 힘듦을 겪어 보질 못했다. 그래서 말로만, 머리로만 이해한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해를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눈을 뜨기가 두렵다고 한 말을 듣고는 새삼 마음을 먹먹하다. 도대체 얼마나 절망스러워야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아침에 그 눈을 뜨기가 두렵다는 말인가. 그것도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늙은 것도 아닌데, 아직도 젊고 활기차고 희망이 있어야 할 그런 젊은이들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다.
 
이 세상이 그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기에 그들은 그리도 힘들어 하고 있을까. 내가 어설픈 고생을 머리 속에 담고 세상을 제법 힘들게 살아왔다고 남들에게 떠들고 있을 때, 남들에게 힘들다고 말할 기회조차 없이 허덕이면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짊어지고 있단 말인가?
 
섣부르게 그들을 이해한다든지,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든지 하는 말 따위를 하면서 위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필요 없는 조언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아마도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그 안타까움 때문에 단 한번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내가 매일 죽음을 떠올리고, 살기 보다는 죽음이 더 편하게 느껴지고, 아무런 희망도 없으며, 절망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놔 버리고 싶은 그런 사람들에게 아주 이기적인 조언을 해주고 싶다.

실제로 조언이라고 해서 별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산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면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다. 별 것 아니니 그냥 좀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삶에 대해서 어떤 기대치를 가졌을 때 결국 우린 절망을 할 수 밖에 없다. 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런 기대치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 어떤 원인으로 인해 삶이 도저히 감당이 안될 정도로 망가졌다고 해도, 만약 내일 모든 문명이 쇠퇴하고 원시의 사회로 돌아가서 누구나 한끼 식사를 먹기 위해서 힘들게 사냥을 하고, 밤이 되면 우리를 노리는 맹수들의 습격에 벌벌 떨면서 잠이 드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실제로 이런 환경에서도 절망을 할 수 있을지를 되물어 봐야 한다.
 
물론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유일하게 받아들여지는 말은 또 다른 이의 절망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이것은 자기 연민이다. 또 다른 이가 자신의 절망을 이해해줄 수 있다는 작은 위로가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위로는 사람을 어떤 것에서 버텨내게 해주는 힘은 주지만,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그래서 자기 위로와 자기 합리화는 당장은 약이 되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결국엔 독이 될 뿐이다.
 
그래서 그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자기 연민을 버리는 것이다. 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것은 누구도 측량 불가능한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어떤 당위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살고 싶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비하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된다. 우리는 누구나 정말로 살고 싶어한다. 죽고 싶어하는 사람조차도 실제로는 살고 싶어한다. 살고 싶다는 것은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절대적 본능이다. 정작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이다.
 
그래서 삶을 내려 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그러니 절망 속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이들은 단지 그것이 하나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이로든 살길이 있다면 아마도 죽음보다는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일단 그래서 자기 연민을 버리고 지금 현재 전혀 해석되지 않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도록 해보자.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왜 이런 절망 속에서도 죽지 않으려고 살 길을 찾고 있을까? 그리고 만약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에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냉정한 판단을 해봐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누구도 어떤 의미도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는 모두 상대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이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미를 찾게 된다. 우리가 다른 이와의 만남이나 소중한 가족과의 관계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비록 상상 속이라도 절대적인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종교를 가져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종교만이 유일하게 절대적 의미를 부여해준다. 이것은 선택이다. 하지만 비록 이런 식으로 절대적 의미를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바뀔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혼자 살다가 죽는 이라면 몇 달 뒤 발견되어 어떤 젊은이의 고독사 정도로 뉴스에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해서 이런 오래된 시체가 발견된 집이 집주인은 세입자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자신의 수익이 줄고, 썩은 냄새가 진동할 방을 청소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릴지도 모른다. 과연 그런 죽음이 삶보다 나은 것일까?
 
아이러니 하지만, 자신이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만 받아들여도 삶을 보는 관점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실제로 절망은 희망이 있기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뭔가 의미가 있다고 믿고 살기 때문에 결국엔 의미 없음을 발견하고는 절망한다.
 
어떤 삶의 방식을 사느냐는 결코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우린 어디선가 배운 정답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동경하면서, 마치 그렇게 살지 못하면 삶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얻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더해서 자기 연민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죽음을 절망 속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의미 없는 삶을 끝내는 죽음이 왜 별다른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죽음을 두렵고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스스로 그 자신의 삶에 대해 밑도 끝도 없는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상 속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지금 여기에서는 단지 조금만 더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미성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당연히 같은 절망을 경험한 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의 조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전혀 공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심지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밖에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왜냐면 이것이 유일하게 진실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길엔 자기 연민도, 자기 합리화도, 그 어떤 부풀림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남의 행복을 깎아 내릴 필요도 없으며, 남을 질투할 필요도 없으며, 남을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릴 필요도 없다. 그리고 너는 나를 모른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내 고통을 네가 아느냐라고 되물을 필요도 없으며,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말을 함부로 한다고도 표현할 필요가 없다.
 
그 어떤 이성적이든 감성적인 반응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외부가 아닌, 그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라는 의미이다.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많은 사람들의 패턴과는 달리 실제로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소중합니다' 라고 말하는 어설픈 위로를 하는 것보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모두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하는 나 자신도 그렇고 듣는 당신 역시도 그렇습니다' 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바꿀 수 있다면 실제로 절망은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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